[여행스케치=서산]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서산목장과 개심사의 5월은 온 천지로 가야 할 봄기운이 이곳에 다 모인 듯 눈부시다. 5월 중순이 넘어도 활짝 피어 있는 벚꽃 덕에 느긋하게 봄 소풍을 떠나기 좋은 곳이다. 서산목장 따라 개심사로 가는 길에 무르익은 봄. 그냥 계절이 여기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광활한 초원 위에 핀 ‘봄’
벚꽃은 여기가 좋네, 산수유는 또 거기가 멋지네 하는 소리에 어디든 가야 할 것 같지만, 꽉 막힌 도로에 상춘객들로 들끓는 소위 ‘스타급’ 여행지를 생각하면 갑자기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혹 나처럼 조금 한적하게 봄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단 운전대를 서산으로 돌려보길 권한다.
벚꽃 활짝 핀 꽃마을, 그것도 사람에 치일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 있다. 바로 상왕산 자락에 펼쳐진 서산목장이다. 먼발치에서 봐야 해 아쉬움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제약 때문인지 널리 알려지지 않아 여유롭게 꽃구경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전국에서 벚꽃 개화일이 가장 늦은데다 몇 년 전부터는 벚꽃축제도 열리지 않아 찾는 이의 발길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찾아주는 이 없다고 꽃이 피지 않을 리 없고 아름다움을 잃었을 리 없다. 오히려 가까이서 볼 수 없어 애타는 마음을 약 올리듯, 어쩌면 예전보다 훨씬 탐스럽게 꽃망울을 터뜨릴지 모른다.
서울을 기준으로 한다면 2시간 남짓, 낭만적인 목장길과 화려한 벚꽃 그리고 마음을 열어준다는 사찰 개심사(開心寺)까지 이어지니, 이만하면 봄나들이 장소로서 자격은 충분한 듯하다.
서산목장은 상왕산을 거의 통째로 개발한, 약 200만㎡의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목장이다. 1969년 정치인 김종필 씨가 산지를 목초지로 개발하겠다고 조선시대 12진산(鎭山)의 하나였던 상왕산의 숲을 베어내고 외국산 풀씨를 뿌려 심은 것이 그 시작이었고, 전두환 정권 당시 부정축재 재산의 환수로 지금은 농협 소유가 되었다. 명칭 역시 삼화목장에서 서산목장을 거쳐 가축개량사업소가 되었다.
목장은 운산 곳곳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드넓다. 사실 드넓다는 표현으로는 한참 부족할 정도로 실제 이곳엘 가보면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형성 과정이 씁쓸하긴 하지만 능선을 따라 펼쳐져 있는 초지를 보고 있으면 한국의 알프스는 아니어도 충남의 알프스라는 이름은 충분히 붙일 만하다. 방목과 체험 등을 하는 평창의 대관령목장과는 목적부터가 달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정취는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 않다.
멀리서밖에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좋아
개심사에 가까워질수록 서산목장 벚꽃 군락도 가까워진다. 혹시나 찾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화려함에 초행이라도 금세 알아볼 수 있다. 초원 위에 도열해 있는 왕벚나무를 보고도 차를 멈추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정도로 이 길은 누구나 한눈에 반할 풍광이다. 2차선 도로이지만 이 주변에만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차를 세우고 부담 없이 구경할 수 있다. 물론 곳곳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표지가 세워져 있고 넘어갈 수 없게끔 철망이 처져 있어 멀찌감치 떨어져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화려함에 취한 탓일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목장에 꽃이 만발하고 개심사의 왕벚꽃까지 가세할 때에는 찾는 이들이 많지만 그래도 여느 축제장과 비교하면 한적할 뿐이다. 예전에 서산목장에서 벚꽃축제를 할 때에는 서산 사람들도 용돈벌이 좀 했다는데 구제역 때문에 그것도 이젠 다 틀렸다고 한다. 지금은 일반인의 출입도 불가능하거니와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방목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다”는 것이 사업소 관계자의 설명이다.
드라이브는 개심사까지 이어진다. 대부분의 드라이브 코스 하면 바다나 호수를 한쪽에 끼고 달리는 길을 꼽지만 이 길은 산과 초원, 물을 두루 만날 수 있는 내륙에선 흔치 않은 드라이브 코스다. 특히 중간에 만나는 신창저수지의 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개심사는 4월 초가 되어도 겨우 벚꽃 봉오리가 맺힐 정도로 계절이 느리게 바뀌는 곳이다. 그래서 조급한 맘에 이미 꽃이 피었겠거니 하고 찾았다가는 실망을 할 수도 있다. 개심사 벚꽃은 어린아이의 주먹 크기만한 겹벚꽃으로, 이를 제대로 보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만개하는 시기가 석가탄신일(올해는 5월 12일) 즈음이다. 전국 벚꽃 개화 시기와 비교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시기지만 그 풍광만큼은 빠지지 않는다.
대웅전과 심검당, 안양루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분홍 벚꽃은 조용하기만 하던 고찰에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개심사의 주차장은 두 곳이지만 이왕이면 첫 번째 주차장에서부터 걸어가 보길 권한다. 상왕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어느새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깊은 숲속에 들어와 있고 세심동(洗心洞)이라는 표석을 만나면 이내 마음을 씻을 준비를 하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누군가가 정성스레 놓은 돌계단을 사뿐히 밟고 가면 된다. 비탈길이지만 돌계단 덕에 편안히 오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절을 구경하기 전, 안양루가 보일락말락한 곳에 눈에 띄는 장소가 하나 있다. 바로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인데 그 위에 외나무다리가 하나 놓여 있어 운치를 더한다. 이 외나무다리로 건너는 게 대웅전에 이르는 본래의 길이라고 한다.
개심사는 참으로 소박한 절집이다. 인근 예산에 있는 수덕사가 유명인들의 발길로 세간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반면 개심사는 있는 듯 없는 듯 그 자리를 지켜왔다. 찾는 이는 적지만 경내가 아담해 쓸쓸하지는 않다.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는 *해강 김규진의 담백한 서체가 돋보이는 안양루를 돌아가면 작지만 야무진 모양새의 대웅전과 자연미를 한껏 살린 심검당이 있다.
이 둘은 개심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입에 오르내리는 대표적인 건물로, 대웅전은 개심사 사적기에 신라 진덕여왕 5년에 지었다고 나와 있으나 1941년 해체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는 1484년(성종 15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나와 있다. 이후 1644년과 1710년에 개수한 정면 3칸 건물로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조선 초기 목조건물이다.
하지만 대웅전보다도 눈에 띄는 곳은 옆에 있는 늙은 집 한 채다. 대범하게도 휘어진 나무를 기둥에 그대로 이용한 건물은 단청을 하지 않아서인지 한눈에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실은 휜 나무를 사용한 이 부분만 후대에 붙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1962년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477년부터 영조에 이르기까지 6번이나 중창을 한 개심사에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상량문에 목수 이름까지 새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사실 서산목장을 시작으로 개심사까지 둘러보면 이전에 미처 와보지 못했던 것이 많이 아쉽다. 벚꽃축제를 열었을 때 목장엘 한번 들어가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그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여지를 남겨두어야 또 오고 싶고 자꾸 생각나기 마련이기에 그냥 슬그머니 여행 목록에 올려놔본다.
봄이면 ‘꽃구경=남쪽 지방’이라는 공식에 살짝 반기를 들어주는 서산에서 만난 또 다른 봄의 표정, 이만하면 올봄 소풍장소로 낙점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단, 늦게까지 볼 수 있다는 소리만 믿고 너무 늑장을 부리지는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