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기차역 여행] 1인 기차역 음성 소이역 역사 속에 묻힐 길었던 외길 이야기 
[기차역 여행] 1인 기차역 음성 소이역 역사 속에 묻힐 길었던 외길 이야기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04.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음성 소이역 철길.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음성] 그곳엔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다. 표를 사는 사람도, 기차를 기다리느라 역전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풍경도 없다. 다만 그곳엔 역으로서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는 역무원만이 있을 뿐이다. 1인 기차역인 소이역의 하루는 시간이 정지된 풍경이다.  

소이역으로 가기 위해서 시골길을 내달린다. 기찻길을 따라 나란히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달리는 길에서 기찻길은 한 번도 눈에 띄지 않는다. ‘과연 이곳에 기차역이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소이면에 들어서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식당이며 관공서들이 딱 시골 풍경이다. 기차가 지나가는 곳을 따라가 소이역을 찾는다. 시멘트로 발라놓은 넓은 역전광장이건만 보따리를 짊어진 할머니도, ‘장미’ 담배를 물고 기차를 기다리는 할아버지도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흔한 ‘역전슈퍼’와 ‘역전다방’ 하나 없다는 것이다.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작은 역이지만 충북선의 이음새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잇는 이종석 역문원.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그야말로 시간이 정지한 듯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소이역으로 들어서자 허름한 소파와 주인 잃은 빈 수족관이 더욱 쓸쓸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열차 시간표를 올려다보니 허전함은 더해진다. 열차번호, 출발시간, 도착시간 칸은 모두 말끔하게 지워지고, 대신 가운데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정차열차 없음’이란 글자가 이곳엔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역무실로 빠끔히 얼굴을 내밀자 이곳의 역무원인 이종석 씨가 “잡지사에서 오신 분 맞지요?”라며 반갑게 손을 내민다. 도착한다는 전화를 미리 해두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시냐고 물어보자 돌아오는 대답이 쓸쓸하다.  

“여기에 오는 사람이라 해봤자 택배기사나 집배원이 다인데 그 외에는 미리 약속한 사람뿐이지요. 오늘 중에는 방문 약속을 하신 분이 기자님이 다입니다. 그 외에 일부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소이역은 한 명의 역무원이 근무하는 ‘1인 기차역’이다. 지금은 이종석 씨를 비롯해 1명의 역무과장과 다른 1명의 역무원이 3교대로 근무하고 있지만, 무정차역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총 8명의 직원이 4명씩 돌아가며 일을 하던 제법 북적거리던 역이었단다.    

“가끔 간이역 풍경을 구경하려고 여행객들이 찾아오곤 하는데, 우리 소이역의 현실은 조금 다르게 되어버렸네요. 간이역의 낭만도 이제 보기 어려워질 거예요. 소이역도 지금은 3명의 역무원이 남아 있지만 올해 안에 폐쇄될 예정이거든요.”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열차시간표엔 더이상 정차하는 기차를 찾을 수 없다.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소이역의 폐쇄 사실을 전하면서 이종석 씨는 짧은 한숨을 내쉰다. 저 안타까운 소식을 이곳을 찾는 다른 이들에게도 몇 번이나 전했을 것이지만, 아직도 한숨 없이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씨가 기차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것은 1974년, 올해로 벌써 34년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오류동에서 처음 역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린 나이에 시작한 역무원 생활은 정말 위험하고 힘들었다. 

“하루는 선로에서 작업을 하다 틈 사이에 구둣발이 끼어버렸는데 저쪽에서 기차가 들어오는 거예요. 주변에 동료들이 있었지만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발은 전혀 빠질 생각을 안 하고, 환장할 노릇이었죠. 기차가 바로 코앞까지 왔는데, 이왕 다리가 잘리려면 발목 아래만 잘리자 싶어 몸을 눕히는데 스르르 발이 빠지데요. 죽을 각오를 하니 삽디다.”

그 이후에도 폭우가 내리던 날 다리 위에서 화물기차 위를 뛰어다니던 기억, 기차 사이를 뛰어다니며 고장난 곳을 고치던 기억 등 기차와 함께 한 34년 세월의 수많은 무용담을 쏟아낸다.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사진처럼 현실에서도 저 기차들이 멈춰 섰으면 하는 바람은 이제 너무 늦은 것일까?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그러는 사이에도 2량의 여객기차와 5대의 화물차가 소이역을 유유히 지나간다. 그중 한 대라도 잠시 멈춰주면 좋으련만 소이역은 이제 그런 곳이 아니었다. 기정사실화된 폐역을 앞두고 이씨는 섭섭하기만 하다. 

소이면 주민들의 경우만 해도 소이역이 무정차역이 되고 나서는 하루에 몇 대 다니지도 않은 완행버스를 타고 음성으로 나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비록 한 달에 소이역을 이용하는 손님이 5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차를 그냥 통과하게 하고 역까지 폐쇄시키는 것은 더 이상 기차가 보따리를 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후한 인심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혼자 근무를 하는 터라 하루가 적적한 것은 물론이고 끼니도 혼자 해결해야 하니 동료들과 따뜻한 밥 먹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지금도 역무실 안엔 작은 주방이 마련되어 있지만 홀로 음식을 하는 손이 영 달갑지 않아 예전보다 손이 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차하는 기차가 없고 찾는 이가 없으니 역사를 꾸미는 것에도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몇 해 전부터는 용역회사에 화장실 청소며 철로 주변 잡초 제거까지 다 맡겨버린 터라 예전처럼 아기자기하게 꽃을 가꾸거나 나무를 손보는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자기 손으로 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니 성에 찰 리가 없다.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하루 종일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소이역 전경. 2008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한 달에 한 번 정도 잡초 제거를 하러 오는데, 어디 그것 가지고 되겠어요? 저거 보세요. 잡초가 어린아이 허리만큼 오지요. 예전엔 직원들이 함께 잡초 제거하면서 막걸리 한잔하고 그런 추억도 있었는데… 많이 아쉬워요.”

이제까지 일했던 곳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역이었다는 양평의 원덕역에서는 동료와 함께 강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술잔을 기울였던 추억도 있다. 그 당시엔 어딜 가나 낭만이 있던 곳이 기차역이었단다. 

“1992년도 평택역에 있을 때는 개표 업무를 봤는데, 당시엔 모든 업무가 사람이 하는 것이라 기차가 들어오면 정신이 없었지요. 전라도 가는 사람이 경상도 기차를 타고 있고, 부산 가는 사람이 서울행을 타고 거꾸로 가고…. 나가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이 뒤엉켜 북적거리던 풍경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지만 그게 기차역의 사람 사는 풍경이었고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네요.”

소이역은 곧 폐쇄되고 이제까지 소이역이 하던 일은 음성역에서 전자시스템이 대신할 예정이다. 사람이 없어진 공간엔 쓸쓸함만이 남겠지만 소이역은 충북선의 든든한 이음새 역할을 해내며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