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평창] 토속 음식은 업신여기면서 남의 것만 좋다고 떠들어대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곳이 있다. 강원도 평창의 전통음식문화체험관이다. 발효음식을 기초로 한 우리 음식에 대한 기본부터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이미 외국인들 사이에선 한국 문화 체험의 장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전통 음식의 대모, 팔 걷어붙이다
평창 금당산 자락의 백옥포리 부근에선 언제나 구수한 음식 냄새가 풍겨온다. 하지만 이곳을 찾은 이들을 맨 처음 잡아끄는 건 멋들어진 한옥과 전통정원이다. 누군가 지은 전원주택 쯤 되겠거니 생각하며 기웃거리고 있자면 한국전통음식문화체험관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데 이게 웬일, 야트막한 산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항아리들의 평화로운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단순한 궁금증으로 방문한 사람들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탄성이 쏟아진다. “어머나, 이 항아리들 좀 봐.” 그 많은 항아리 대부분에 고추장, 된장 같은 재래 장이 익어가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으면 사람들의 눈은 한층 휘둥그레진다.
한국전통음식문화체험관은 발효식품을 기본으로 한 우리네 전통음식을 알리는 데 앞장서는 곳이다. 물론 식당도 운영하고 있지만 음식과 관련된 다양한 체험과 휴식까지 가능한 곳이라는 게 맞는 설명인 듯싶다. 사실 식사보다도 구경을 위해 체험관을 찾는 이들이 훨씬 많다.
음식문화체험관을 이끌고 있는 이는 조정강(71세) 원장. 서울에서 오랫동안 ‘동촌(東村)’이라는 고급 한식당을 운영하던 그가 식당을 접고 음식문화체험관을 건립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하다. 식당 운영만으로 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었지만 천대받는 전통 음식의 기틀을 다시 세우고 싶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강조하는 것은 밥상의 기초가 되는 발효식품의 중요성이다. 이는 단순한 지식 전달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이기에 그가 손수 팔을 걷어붙였다. 조 원장이 ‘한국 전통 음식의 대모’라 불리는 이유다.
물론 처음 식당을 시작했을 때 남다른 사명감은 없었다. 막내딸을 낳고 갑자기 쓰러진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이어가야 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식당이었다. 본래 손맛이 좋아 요리에 자신은 있었지만 그 정도로 성공을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단다.
그렇게 번 돈으로 7남매를 모두 키웠고 1999년에는 사재 30억원을 들여 음식문화체험관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여름, 체험관 문을 연 지 8개월 만에 홍수로 천장 전등만 빼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 다시 일어섰지만 조 원장을 비롯한 직원들에게는 뼈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지금도 체험관 옆을 흐르는 금당계곡 주변은 보수가 한창이다.
한국의 맛을 알리는 다양한 프로그램
자신을 2남 5녀 중 넷째 딸로 소개하는 김주혜 이사와 함께 체험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가장 눈길을 끈 항아리들은 황토와 마사토, 숯, 석회 등을 층층이 올려 다진 땅 위에 마련했다. 이렇게 하면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여름에도 벌레가 생기지 않아 일정한 맛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김 이사의 설명이다. 이것 역시 조상들의 지혜란다.
또 하나 이곳의 자랑은 일 년 내내 5℃를 유지하는 석빙고다. 박물관 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놓은 보물창고로 이중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소한 젓갈 내음이 난다. 야외에 자리한 항아리에 된장, 고추장 등이 담겨 있다면 석빙고에선 액젓과 산나물 장아찌류 40여 가지를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음식의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평소엔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는 곳이다. 음식문화체험관은 유독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 세계적으로 한국 음식의 위상이 높아진 까닭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런 관심이 식지 않게끔 뒷받침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30명 정도의 인원이라면 실내 실습실을, 많은 인원일 경우엔 정원을 이용한다.
비빔밥은 물론 평창에서 많이 재배되는 메밀을 이용한 전병, 메밀무침 등을 만들기도 하는데 반응이 꽤나 뜨겁다. 체험 프로그램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데, 당일 체험으로 11월에는 김장김치 만들기, 12월에는 청국장 만들기가 가능하다.
드라마 <식객> 속 넉넉한 풍경
음식문화체험관이 최근 들어 더욱 주목을 받은 건 드라마 <식객>의 주요 장면을 촬영하면서부터다. 충무로의 한식집, 경주 한옥호텔 라궁과 함께 한국음식문화체험관 역시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수백 개의 장독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면을 보고 시청자들 사이에서 있다 없다 말들이 많았는데, 실재하는 장소로 알려지면서 체험관을 찾아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운암정의 장맛이 변한 원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결국 성찬이 간수를 제대로 빼지 않은 소금이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던, 긴장감 넘치는 장면 대부분은 모두 이곳에서 촬영했다.
또 극중에서 선조들이 물려준 장독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오숙수가 서 있던 곳도,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며 항아리를 부수던 장면 역시 체험관이다. 깨진 항아리 조각은 관람객들을 위해 아직 남겨두었다. 또 미관을 위해 연못 뒤편에 자리한 화장실은 극중에서 소금창고로 나오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