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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이대흠의 제주여행] 내동 알작지 일몰 지는 것이 아름답다
[이대흠의 제주여행] 내동 알작지 일몰 지는 것이 아름답다
  • 이대흠 기자
  • 승인 2008.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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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1월. 사진 / 이대흠 기자
알작지 전경. 2008년 11월. 사진 / 이대흠 기자

[여행스케치=제주] 해는 진다. 이때의 ‘진다’는 말은 중의적이다. 사라진다는 의미의 단어로도 쓰이지만, ‘이긴다’의 반대말로도 쓰인다. 사전에는 따로 실려 있지만, 두 가지 의미는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라지는 것, 너머로 가는 것이 지는 것이다. 해는 사라진다. 해는 이기지 않는다. 지는 것이 진리다.

겨울은 지는 계절이다. 철저히 지고 나서 봄을 낳는 계절이다. 지는 것이 없다면 새로운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는 것이 아름답다. 한 해가 다 가고 있다. 이런 때에는 일몰을 봐야 한다. 영원히 뜨는 태양은 없다. 하루 동안 뜨거운 몸으로 살았던 해는 결국 진다. 지는 해는 노을을 낳고, 지는 해는 수평선의 칼날에 서서히 잘린다. 그리고 사라진다. 해는 날마다 진다. 

일몰을 보려면 알작지로 가야 한다. 날마다 졌던 해가 동그란 돌멩이가 되어 뒹굴고 있는 곳. 알작지는 알 같은 자갈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작지’는 자갈의 제주말이다. 알작지의 동그란 돌멩이들을 보면서, 바다의 알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둥글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 적이 있다. 둥글둥글 살려고 해도 이따금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긋나기도 한다. 그도 둥글게 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둥굶이 다른 둥굶을 만나면 부수어진다. 그렇게 부수어지고 부수어진 것들이 모여 주름이 된다. 나의 둥굶을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주름이다. 주름은 수많은 둥굶이 모인 것이다. 주름은 이기려 하지 않고, 져서 얻은 훈장이다.

둥근 돌을 보며, 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수억 년 동안 날마다 졌던 해가 식고 닳아 알작지의 돌이 되었을까. 자그락자그락 둥굶이 둥굶을 만나 내는 소리를 듣는다. 둥근 몸이 둥근 몸을 읽는 소리를 듣는다. 성스러운 일은 몸으로 몸을 읽는 것이다. 온몸으로 온몸을 읽어도 타자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상대를 읽으려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게 오래 읽으면 둥글어진다. 그래서 오래 상대를 읽은 자는 상처가 많다. 둥글어져 있다.

2008년 11월. 사진 / 이대흠 기자
알작지에서 바라본 일몰. 2008년 11월. 사진 / 이대흠 기자

행정구역상으로는 내도동이라 불리는 알작지  바다. 동사무소도 없는 내도동은 바다의 알이 슬고, 자라고, 바다가 태어나는 곳이다. 이곳에서 끊임없이 바다가 태어났기에 바다는 억겁토록 마르지 않았다는 상상을 해본다. 

바다가 보내준 공기는 부드럽다. 살이 살을 맞댔을 때처럼 착착 감긴다. 어린 딸아이의 볼살 같다. 물이 빠졌을 때는 게나 보말을 잡는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따금은 해녀를 볼 수도 있다. 바다에서 살아서인지 해녀들은 억양이 드세다. 그렇잖아도 제주어를 잘 모르는 사람은 대화를 해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있다. 굵은 바위틈으로 들어간 게를 잡으려는 아이도 있다. 아이는 막대기 하나를 들고 다니며 게를 잡는데, 참 잘 잡는다. 막대기를 들고 다니는 이유가 있다. 바위틈으로 들어가버린 게를 잡으려 손을 뻗치면 게는 더 깊이 들어가버린다. 그럴 때 막대기로 건드리면 게가 움직인다. 가만히 있으면 잡히지 않았을 게가 막대기에 놀라서 잡히는 것이다.

물이 들어올 때면 고기도 같이 들어온다. 낚시하는 모습은 자주 봤지만, 큰 고기를 잡은 것을 본 적은 없다. 아이들도 방파제에서 낚시를 한다. 주로 잡히는 것이 고도리라 불리는 고등어새끼다. 이따금은 돔새끼나 학꽁치가 잡히기도 한다.

방파제에 서서 외도 쪽을 바라본다. 내도와 외도 사이의 바다는 제주에서 물결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파도의 움직임이 음악 같다. 그대로 오선지에 옮기면 명곡이 될 것이다. 음악이 아닌 자연이 어디 있겠는가만, 해 질 무렵 내도 바다는 천재의 음악보다 뛰어나다. 

해가 진다. 불에 달군 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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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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