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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우리 이웃들의 겨울나기] 세 가구 오붓한 단양 배마루마을 세 집 김장이 마을 잔치가 돼버렸대요
[우리 이웃들의 겨울나기] 세 가구 오붓한 단양 배마루마을 세 집 김장이 마을 잔치가 돼버렸대요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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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단양 배마루 마을 전경.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단양] 산골마을의 겨울은 언제나 한적하다. 더구나 마을 주민이 채 1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작기에 더 소박하고 따뜻한 정이 오가는 것이 산골 오지마을이다. 고작 세 가구만이 오롯이 살고 있는 배마루마을의 평화로운 겨울 이야기. 

배마루마을은 오지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고속국도가 바로 지척이고 북단양IC에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마루마을이 속한 각기리 전체로 보자면 평범한 시골마을과 다름없다. 말하자면 배마루마을은 각기리 중에서도 윗마을에 해당하는데, 웬만한 주민들은 큰길과 가까운 아랫마을에 적을 두고 살고 있으니 윗마을에 해당하는 배마루마을엔 자연히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아랫마을에서 배마루마을로 가는 길은 꽤 깊숙하다. 좁은 길을 따라가다 맞은편에서 차라도 나올라치면 꼼짝없이 후진을 해서 길을비켜줘야 한다. 이렇다 보니 외지인들에게 ‘오지 아닌 오지’로 불리게 되었다. 4km에 이르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그나마 수월해졌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배마루마을의 가장 웃어른인 전인출 할아버지.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배마루마을에 이르니 공기가 확실히 다르다. 마을이 들어선 높이도 그렇지만, 오염될 만한 것들이 거의 없으니 코가 뻥 뚫리는 기분이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낯선 이가 ‘침입’한 것을 마을 개들이 먼저 알아차린다. 컹컹 짖어대는 소리도 소리지만, 산이고 밭이고 이 평화로운 공간에 개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한 상황이 민망스럽다. 하지만 누구 하나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내미는 이도 없다. 

그때 굽은 등을 한 할아버지가 배추밭에서 나를 바라본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자 할아버지는 미소만 짓는다. “서울에서 왔네, 사진 찍으러 왔네” 하시며, 내가 떠들어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할아버지는 추운데 방으로 가자신다. 

할아버지네 집은 전형적인 산골의 황토집이다. 어디 부서진 데야 어쩔 수 없이 요즘의 것들을 덧댔지만, 집은 여전히 옛날에 지었던 모습 그대로다. 

손님을 들이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으시던 할아버지는 뭔가 생각난 듯이 작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켠다. 그러곤 노란 커피믹스를 꺼내어 커피를 타주신다. 갑작스런 커피믹스의 등장이 당황스럽다. 이 그림과 이 그림을 조합시킬 준비를 하지 못했던 탓이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황토집의 모습이 그대로인 배마루마을.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강원도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6·25 전쟁에 참전해 이 부근까지 내려왔다가 전쟁이 끝난 스물다섯 살에 장가를 가서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가유공자 전인출’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패를 꺼내어 보여주신다. 말은 하지 않지만 할아버지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젊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곳으로 오고 나서는 줄곧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그때만 해도 30여 가구가 모여 살던 마을이었으니 농사도 크게 지었고 농작물을 밖에 내다 파는 재미도 쏠쏠했단다. 

“자식들은 ‘우리처럼 이래 살지 말고 도시 나가서 살아라’며 내보내고, 같은 마을 동무들은 다 죽어버렸으니 이제 남은 건 등 긁어주는 할머니와 집 지키는 개 두 마리가 전부래요.”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고작 세 집 김장이  마을 전체의 김장이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전이 금지된 후부터는 그나마 텃밭에 배추며 고추를 기르며 소일거리 하는 재미로 사는데, 겨울엔 이마저도 할 수 없으니 요즘은 마냥 텔레비전을 보거나 바뀌지도 않는 금수산을 바라보는 게 일이라고 한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할머니들은 요 앞에서 김장하고 있으이 가보래요” 하시는 할아버지 말에 인사를 드리고 앞집으로 간다. 작은 방에서 할머니들이 김치 담그는 일에 한창이다. 마을 주민이라 해봐야 고작 다섯 명. 그중에서 아낙은 세 명뿐이니 집안 행사인 김장이 마을 대소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어디 시골 김장이 자기들만의 김장인가.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 다 큰 손자 손녀들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수대로 배추를 나누어 놓았으니 작은 방 안에 배추가 넘쳐난다. 하지만 김장을 하는 손길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다 자식들 입으로 들어갈 것들이기 때문이다. 부모 마음은 어딜 가나 다 똑같은 모양이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막 담근 김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최고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뭐 볼 거이 있다고 요고까정 찾아왔데요?” 
신순옥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투와는 달리 “기래도 김치 담그는데 놀로 왔으이 운은 겁나게 좋은 기래요” 하시며 하얀 쌀밥과 동태찌개에 이제 막 담근 김치를 쭉쭉 찢어서 그릇에 담아주신다. 허기진 배와 몇 년 만의 김장김치에 눈이 돌아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에 할머니들은 “마이 굶았나” 하시며 서로 김치를 얹어주신다. 

“이게 다 우리가 농사지은 배추며 고추래요. 여기야 바깥에 나가기도 힘들고 우리가 농사를 지으니 사서 먹을 게 있대요? 어딜 가도 이런 김치 먹기 힘들 끼래요.” 

어쩐지 김치가 달다 했더랬다. 고랭지 배추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배마루마을의 다섯 주민이 정성스레 기른 배추로 담근 것이니 입에도 달지만 마음도 달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마늘이 주렁주렁 황토벽에 열렸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벌써 고봉밥 세 그릇을 비운 나에게 또 다시 고봉밥을 얹어주시는 할머니.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김순예 할머니는 “옛말에 김장하는 데서 밥 잘 못 묵는 사람하고는 상종도 말라 했어” 라며 잔소리 말고 주는 대로 먹으라 한다. 

그렇게 밥 네 공기를 비운 후에야 할머니들은 나에게 밥 주기를 멈추셨다. 
“밥 다 묵었으면 저기 전씨 할아버지네 가보래요. 거 가믄 커피 타줄 끼래요.”
그것을 어찌 알았냐며 물으니 박금분 할머니는 “내가 그 집 할머니래요” 하시며 웃는다. 

아직도 배추가 한가득이지만 서울로 향하는 길이 멀어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오니 전인출 할아버지가 마당에 하릴없이 앉아 계신다. 그냥 목인사를 하고 차에 오르려 하니 마음 한 편이 먹먹해진다. 

할아버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산골마을에 싸리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허~’하며 길게 내뱉는 숨에 입김이 뽀얗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차가운 눈 때문에, 따뜻한 인정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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