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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여행의 추억] 그해, 네팔의 추억 히말라야에서 길을 잃다
[여행의 추억] 그해, 네팔의 추억 히말라야에서 길을 잃다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3.05.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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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6월 사진
2013년 6월 사진

[여행스케치=네팔] 최근 케이블 드라마 <나인>이 인기를 얻으면서 그 배경으로 나온 네팔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늘었다. 드라마가 아니라도 유서 깊은 역사와 세계 최고봉의 히말라야 산을 품고 있어서 네팔은 항상 많은 이의 동경의 대상이다. ‘네팔’이라는 이름도 ‘신의 보호’라는 뜻이라는데, 그러나 네팔 여행은 생각지 못한 반전의 연속이다. 

카트만두에 발을 내딛는 순간, 여행자의 막연한 환상이 여지없이 깨졌다. ‘히말라야의 오지 국가’ 네팔의 수도는 글자 그대로 ‘매연의 도시’였던 것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릭샤(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택시)는 전 세계에서 폐차 직전의 것들만 모아놓은 듯, 차원이 다른 매연을 뿜어댔다.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편하게 숨 쉬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으나, 호텔 방에 들어가니 그나마 좀 나아졌다. 허름했지만 이름만큼은 ‘티베트 피스 하우스(Tibet Peace House)’이다. 


체크인을 마치자 호텔의 지배인이 먼 이국에서 온 내게 전통공연 관람을 권했다. 마침 오늘 밤에 좋은 공연이 있다는 거다. 오래 머물지 않을 도시지만 그래도 전통공연 정도는 보아두는 것이 좋겠다 싶어 매니저를 따라나섰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관광지의 전형적인 공연장이었다. 넓은 뷔페 식당과 무대. 특별한 것이 있다면 관객이 달랑 나 혼자, 아니 매니저와 단둘뿐이라는 점이었다. 단 하나뿐인 유료 관객을 위해 무대 위 사람들은 열심히 노래하고 춤을 췄고, 나 또한 객석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공연 후, 남자 친구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여자 무용수의 수줍은 미소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2013년 6월 사진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강은 인도까지 흘러간다. 2013년 6월 사진

고공의 광주리는 오누이를 싣고
다음 날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카트만두 대표 관광지를 순례하는 ‘의무 방어전’을 마치고, 히말라야 트레킹의 출발지인 포카라로 향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가는 길은 하루짜리 래프팅 코스이기도 하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그림 같은 협곡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강은 평화로운 항해를 약속했다. 

우리 팀은 모두 여덟이었다. 항해사 겸 요리사인 네팔 청년, 홍콩 여성 둘, 서양인 남녀 셋, 광저우 아저씨와 나까지. 그렇게 급류 하나 없는 물결을 따라 그림 감상하듯 풍광을 즐기며 가는데, 서양 남성이 갑자기 뒤쪽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협곡 사이로 이어진 가느다란 와이어에 광주리 하나가 매달려 있고, 맙소사, 그 안에 일곱 살, 다섯 살쯤으로 보이는 오누이가 담겨(!) 있었다. 오지 탐험 프로그램에서 본 듯한 장면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협곡을 잇는 와이어에 매달린 광주리는 수동 케이블카였던 것이다. 누나가 열심히 와이어를 잡아당기며 흔들흔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기겁을 하고 어서 돌아가라 손짓을 했지만, 오누이는 그것을 반갑다는 인사로 알아들었는지 더욱 의기양양 협곡을 건넜다. 

2013년 6월 사진
네팔의 국교는 힌두교. 하지만 불교 신자도 10%에 이른다. 2013년 6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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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을 빼곡히 적어 넣은 형형색색의 천. 2013년 6월 사진

잠시 후 우리는 오늘의 점심 식사 장소인 강변 모래톱에 도착했다. 잘생긴 네팔 청년은 야채를 다듬고 카레를 끓이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고, 참한 홍콩 여성 둘이 청년의 점심 준비를 도왔다. 서양인들은 고무보트에서 내리자마자 훌렁훌렁 옷을 벗고 일광욕을 즐겼다(물론 수영복은 입었다). 그리고 광저우 아저씨와 나는 모래톱 구석에 가서 맛나게 담배를 나눠 피웠다. 역시 담배는 이렇게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피우는 것이 제맛이라는 듯, 만족한 웃음을 연신 흘려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나절 래프팅이 끝나고, 버스로 옮겨 타니 어느새 포카라다. 아직 3월이었지만, 햇살 뜨거운 포카라는 벌써 한여름을 무색케 했다. 이곳은 카트만두에 이은 네팔 제2의 도시이자, 히말라야의 여신,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출발지다. 나는 당시 한국인들이 많이 머문다는 게스트하우스에 방을 잡고 같이 트레킹할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돈이 많아 보이는 서양 친구들은 가이드와 포터뿐 아니라 요리사까지 대동하고 느긋하게 트레킹을 즐겼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자기끼리 팀을 짜서 트레킹에 도전했다. 트레킹 코스는 힘들긴 해도 험하지 않았고, 지도는 정확하고 친절했으며, 30분마다 하나씩 로지(산 위의 숙소)가 있으니 굳이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도에 난 길로만 충실히 갈 경우’에만 그랬다. 군대를 갓 제대한 청년이 포함된 한국인 트레킹 팀은 특유의 ‘하면 된다’ 정신을 발휘하다, 결국은 사고를 치고 말았다. 

2013년 6월 사진
신성한 강가(겐지스) 강. 2013년 6월 사진

황천길이 될 뻔한 지름길
우리 팀은 모두 3명이었다. 30대 초반의 나, 20대 여성, 갓 제대한 혈기 왕성한 청년 하나.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해발 900m에서 출발해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코스다. 흔히 ABC 코스라고 부른다. 올라가는 데 5일, 하산에 3일, 모두 8일의 일정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힘은 들었지만, 주위에 펼쳐지는 설산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렇게 사흘째 날, 언제나처럼 지도를 확인하고 길을 나서는데, 갓 제대한 청년이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가보자고 했다. 지도대로 가면 너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가리킨 지름길은 원래 코스의 1/5 길이에 불과해서 조금씩 지쳐가던 우리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2013년 6월 사진
네팔의 스투파(탑)마다 그려진 ‘깨달음의 얼굴’. 2013년 6월 사진

하지만 여기는 히말라야 아니던가. 동네 뒷산에서 길을 잘못 들면 조금 고생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여기서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지름길 쪽을 바라보는데, 거기에 분명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그래도 여성은 안전 제일을 주장하였으나, 고심 끝에 내가 예비군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결국 우리는 지름길로 나섰다. 

그런데 조금만 가면 로지가 나올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왔던 길마저 사라지고 사방은 깎아지른 산으로 막혀버렸다. 그리곤 정말 산이 무슨 장난이라도 치는 듯, 거짓말처럼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단 높이 올라가 한뎃잠을 자기로 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는데, 후드득, 빗방울까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젠 더 올라갈 수도 없는데, 여기서 계곡물이 불어버린다면? 

2013년 6월 사진
 3억3000만 힌두의 신들은 저마다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2013년 6월 사진
2013년 6월 사진
힌두교 수행자인 사두는 강가 강을 따라 수행을 한다. 2013년 6월 사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인데, 졸음이 몰려왔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문득 깨어보니 바로 눈앞에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을 켜놓은 듯한 일곱 개의 별이 책에서 본 것처럼 국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놀랐지? 안심해. 너희가 너무 겁 없이 덤벼서 산이 장난 조금 친 거니까,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다음 날 우리는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짚어 원래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일정은 하루 늦어졌지만, 목숨에 비하면 하루 이틀이 대수랴.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트레킹을 마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때 히말라야에서 본 북두칠성 별빛이 내 가슴속에 반짝이고 있다. 히말라야의 여신, 안나푸르나의 장난스러운 미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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