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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명사와의 여행 ②] 허영만 화백과 함께한 일본 야마가타 현 소바 기행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깊은 맛
[명사와의 여행 ②] 허영만 화백과 함께한 일본 야마가타 현 소바 기행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깊은 맛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3.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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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여행스케치=일본] 지난 규슈 가라쓰 시 여행(본지 2013년 1월호 게재)을 함께한 인연으로 다시 한 번 허영만 화백의 일본 여행길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소바와 온천의 고장’ 야마가타 현이다. 사실 <식객 시즌2>의 연재를 앞두고 있는 허 화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소바 마니아. 그와 함께 진짜 소바를 찾아서 야마가타로 떠났다.

일본의 야마가타 현(山形)은 이름 그대로 산의 고장이다. 게다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일본의 스키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한국 스키어들 사이에도 유명한 자오 스키장, 여름에도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갓산 스키장 등이 이곳에 있다. 이름난 온천도 많다.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다가와 온천, 일본의 국민 드라마인 <오싱>의 무대가 된 긴잔 온천 등이 야마가타 현에 자리하고 있다. 


산과 눈이 많다는 것은 스키와 온천에는 좋지만 아무래도 농사에는 불리한 조건일 터. 하지만 척박한 지형이 준 또 하나의 선물이 있으니, 바로 소바(蕎麥, 메밀·메밀국수)다. 중국이 원산지인 메밀은 서늘하고 습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작물.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 평창이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된 것이다. 산과 눈의 고장 야마가타는 일본 3대 소바 생산지 중 하나이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소바로드’가 생긴 곳이기도 하다. 소바가 많이 생산될 뿐 아니라 연중 기온차가 커서 소바의 맛과 향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거는 허영만 화백의 기대가 각별했다. 허 화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소바 마니아. 일본의 어느 식당에 가서 무슨 음식을 먹든, 만약 그곳에 소바 메뉴가 있으면 꼭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릴 정도다. 수십 차례 일본을 여행하면서 찾았던 맛난 소바집을 줄줄이 꿰고 있는 그에게 ‘소바의 고장’ 야마가타는 매력적인 여행지였다.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소박한 소바의 원형, 소바가키 
야마가타에서 우리를 먼저 맞아준 것은 소바가 아니라 온천이었다. 현 내 35개 지역 모두가 온천수가 솟아나는 온천의 고장이니, 먼저 온천물에 몸을 담가 여행길 피로를 푸는 것이 순서인 듯도 했다. 그중에서도 일행이 처음 찾은 곳은 1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유다가와 온천. 지금도 매분 약 1000ℓ의 온천물이 솟아오르는 덕분에 어디서나 흘러넘치는 온천수에 몸을 담글 수 있다. 

이곳에선 450년쯤 되었다는 료칸(旅館, 일본식 전통 여관)에 묵었는데, 마침 이곳의 오카미상(御上さん,여관 안주인)이 한국분이었다. 인근에서 료칸을 운영하던 미국인 오카미상이 일본인 남편과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분이 일본 전체의 유일한 외국인 오카미상이 되었단다. 벌써 여러 대를 이어온다는 료칸 건물은 미로 같은 복도로 이어졌다. 흡사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료칸 같다. 실제로 이 작품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곳에 머물렀다니 정말 작품 속 료칸의 모델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튿날 하구로 산의 삼나무 숲길을 산책한 후, 드디어 소바를 만났다. 먼저 맛본 것은 ‘소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소바가키. 우리말로 하자면 메밀국수가 아니라 메밀범벅이다. 묽은 메밀 반죽을 묵처럼 삶아 먹는 음식으로 야마가타 전통의 가정식 요리란다. 사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제주의 메밀범벅(는쟁이범벅)이 그런 것처럼 소바가키도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메밀로 가장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국수를 만들 시간도 없었던 제주의 해녀 어머니가 간단한 메밀범벅으로 아이들을 배불리 먹였듯, 야마가타의 어머니들도 소박한 소바가키로 식구들의 한 끼 식사를 책임졌을 것이다. 소바가키를 맛본 허영만 화백은 “그 옛날 꽁보리밥의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 점심 식사는 우리로 치면 ‘보리밥 정식’쯤이 될 터이다. 

구레나이엔 (くれなぃ苑)
가격 소바가키 코스 1550엔, 
2100엔, 3150엔 
주소 山形村山市大字大久保甲4 

소바의 변신, 소바맥주
‘소바의 원형’으로 신고식(?)을 치렀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소바를 맛볼 시간. 일본 최초의 소바로드 발상지인 ‘모가미가와산난쇼(最上川三難所) 소바로드’의 13번째 소바집으로 향했다. 취미로 소바 동호회에서 활동하다 본격적으로 소바집을 운영한 지 20년이 되었다는 소바 명인 주인장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반죽부터 시작했다. 

가을에 수확한 메밀을 차가운 물에 열흘 정도 담가 불순물을 빼고, 다시 찬 바람에 말린 후 가루를 내면 달고 차진 소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반죽을 하고 면을 자르고 소바를 삶아내 넓은 판에 수북이 담은 것이 ‘이타 소바’다. 원래 야마가타에서 소바란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내기나 수확 같은 작업을 공동으로 하는 날 같이 먹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커다란 판(板 이타)에 담긴 소바를 여럿이 함께 먹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도끼처럼 생긴 커다란 칼로 썰어낸 면발을 딱 2분간 삶은 소바는 담겨 나올 때부터 특유의 메밀 향이 느껴졌다. 한 젓가락을 잡아 쓰유에 찍어 입안으로 가져가니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식감, 부드러운 목 넘김에 이어 입안 가득 퍼지는 메밀 향이 자꾸 다음 젓가락을 재촉한다. 수북이 쌓인 소바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소바유(소바 삶은 물)를 차처럼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고 보니 참 소바는 대단한 음식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구황작물의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도 이토록 깊은 맛과 향을 간직하고 있으니. 

“야마가타의 소바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첫 젓가락을 뜨고 입안 가득 메밀 향을 음미하던 허 화백의 소감이다. 

그런데 소바의 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범벅이나 국수만이 아니었다. 이날 저녁 묵은 료칸의 주인장은 벨기에에서 직접 배웠다는 맥주 양조 기술로 만든 소바맥주를 대접했다. 메밀 중에서도 중심의 씨눈 부분만으로 만든다는 소바맥주는 부드러운 거품 아래 소바 특유의 쌉싸래한 향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벨기에에서 맛보았던 과일 맥주의 향이 느껴졌다. 

소바의 향연은 평양냉면 스타일의 ‘니쿠 소바’로 이어졌다. 닭고기 국물에 닭고기 고명을 얹어 먹는 니쿠 소바는 가볍고 산뜻한 맛이다. 점심에 먹었던 이타 소바가 정통이라면 니쿠 소바는 퓨전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소바가키에서 이타 소바, 소바맥주, 니쿠 소바로 이어지는 소바의 향연이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다키타소바주쿠(瀧田そば塾)
가격 자루소바 800~1000엔 정도 
주소 山形村山市河島乙99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소바 장인과 함께한 소바 만들기 체험
소바의 본고장인 만큼 ‘소바 만들기 체험’을 빼놓을 수 없다. 체험은 160여 년 전에 지어진 누에고치 창고를 그대로 옮겼다는 소바집 옆 작은 작업장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메밀과 강력분을 8:2로 섞은 1kg의 가루에 뜨거운 물 270㎖를 부어 반죽을 시작한다(찬물로 반죽을 하면 더 차지고 오래 보관이 가능하지만 반죽이 힘들단다). 메밀에 강력분을 섞은 것은 점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메밀가루만으로 반죽을 하면 잘 뭉치지 않기 때문이다. 메밀가루가 뜨거운 물을 만나니 메밀 향이 확 피어오른다. 직접 반죽을 하던 허 화백이 “아, 이거 얼른 먹고 싶은걸” 하며 입맛을 다신다.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충분한 공기를 넣어주면서 큰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죽이 되면 더운물 200ml 정도를 더 부어 하나의 큰 덩어리로 만든다. 그리고 이때부터 반죽을 돌려가면서 350번 정도 치댄다. 그런데 100번을 넘어서자 손목이 조금씩 저려오더니 200번 가까이 되었을 때는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옆에 있던 장인이 반죽을 넘겨받아 익숙한 솜씨로 주무르니, 낯선 손길에 뻣뻣하게 굴던 소바 반죽이 금세 부드러워진다. 

이제 기다란 나무 봉으로 반죽을 펼 차례.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체중을 봉에 실어 굴리는 것이 포인트다. 이때 반죽이 봉이나 도마에 들러붙지 않도록 수시로 메밀 씨눈을 빻아 만든 흰 가루를 뿌려준다. 어느 정도 펴진 반죽을 봉에 감고 5번을 더 굴린 뒤 방향을 바꾸어 한 번 더 하니 제법 넓은 보자기 같은 모양이 나왔다. 이것을 다시 사방으로 돌려가면서 5번씩 봉으로 밀면 반죽 펴기 완료. 이걸 다시 이불 개듯 3번 접어 6겹으로 만든다.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2013년 4월 사진 / 김형호 사진작가

소바를 자르는 칼은 넓은 직사각형으로 칼날 안쪽으로 손잡이가 달렸다. 반죽 위에 나무판을 자처럼 대고 칼에 몸을 실으면 칼국수 같은 면발이 생긴다. 이때 칼을 조금 왼쪽으로 움직여 자연스럽게 나무판이 이동하도록 하는 것이 요령이다. 이런 식으로 일정한 힘을 주면 균일한 넓이의 소바 면이 잘려 나온다. 소바 1인분의 무게는 140g. 

소바 면을 만들어놓고 식당 자리에 와 앉아 있으니 잠시 후 그릇에 소바가 담겨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어서 그런지 여느 소바보다 더 맛있게 느껴진다. 정신없이 먹으니 어느새 우리가 만든 것뿐 아니라 그날 만들어놓은 소바를 우리가 모두 먹고 말았다. 1인당 3인분 이상은 먹은 듯하다. 물론 평소 엄격한 식습관으로 젊을 때의 몸매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허 화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소바는 많이 먹어도 위에 큰 부담이 없다. 밀가루는 속에 들어가면 불기 시작하지만, 소바는 그대로 소화가 되기 때문이란다. 

역시 소바유로 마무리. 입안 가득하던 메밀 향이 코끝에 머문다. 야마가타의 봄은 향긋한 소바와 함께 찾아오는 듯하다.

노도카무라(のどか村)
가격 소바 650엔 
주소 山形西置賜郡白鷹町大字深山 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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