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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③] 젊은 그들의 삼일천하 우정총국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③] 젊은 그들의 삼일천하 우정총국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2.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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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19세기 말의 한반도는 말 그대로 백척간두, 한 걸음만 삐끗해도 망국의 길로 빠져드는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다. 디데이는 당시로선 최첨단 정보 시스템인 우편제도를 총괄하는 우정총국 개소일. 하지만 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고,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사건의 현장에선 다시 우편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우정총국’이라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우정총국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괄호 안에 ‘우체국, 기념관’이라 씌어 있고 그 아래 영어로 ‘Post Office’라 한 것을 보면 우체국은 우체국인 모양이다. 힐끗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기와지붕의 옛 건물 앞에 붉은 우체통이 눈에 띈다. 마침 그 옆으로 금발머리의 외국인이 무언가 팸플릿 비슷한 것을 챙기며 나온다. 


이곳이 바로 128년 전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우체국이자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 우정총국이다. 

이정표에 씌어 있는 것처럼 이곳에선 현재 우편 업무를 보고 있다. 하지만 건물 안 대부분은 우편 전시관의 역할을 한다. 곱게 단청을 한 천장 아래로 갓을 쓰고 곰방대를 물고 있는 100여 년 전 우편배달부의 모습도 보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5종 세트에, 초대 우정총판이었던 홍영식의 흉상도 보인다. 당시 갓 서른 살이었던 홍영식은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가서 뉴욕 우체국 등을 둘러보고, 고종에게 근대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진언하여 우정총국을 만들고 초대 우정총판에 올랐다. 동시에 그는 김옥균이 이끄는 급진 개화파의 일원으로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민씨 일가를 몰아내고 적극적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갑신년 음력 10월 17일(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건물의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킨다.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대한민국 최초의 우체국 우정총국.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갑신년 겨울, 정변의 불길이 솟아오르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나름대로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우정총국 축하연에 당시 권력 실세였던 민씨 일가를 부르고, 궁궐에서 불이 솟는 것을 신호로 이들을 처단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바로 고종과 명성왕후의 신변을 확보하고 새로운 개화 정부를 출범시키면 상황 끝. 최대 걸림돌은 민씨 정권을 후원하고 있는 청나라 세력이었지만, 이들보다 더욱 근대화된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일본 영사관에서 정변을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우정총국 현판.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드디어 디데이. 하지만 상황은 처음부터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궁궐의 불길이 끝내 솟아오르지 않았다. 준비한 화약이 불발된 것이었다. 부랴부랴 다른 곳에 불을 놓아 쿠데타를 시작했지만, 제거 대상 1호였던 민영익이 중상을 입긴 하였으나 기어코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그래도 고종 내외의 신변을 확보한 것은 큰 성과였다. 이들을 창덕궁 옆 경우궁으로 옮기고 한양 곳곳에 방을 붙여 정변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민씨 정부의 구조 요청을 받은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했고, 일본 측은 청과의 충돌이 전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한 발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근대 우표 5종 세트. 디자인이 지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갑신정변으로 인쇄 기기가 불에 타 발행이 중단되었다.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다음 날, 분위기를 간파한 고종 내외는 좁은 경우궁이 불편하다며 창덕궁으로 옮기기를 원했다. 넓은 창덕궁은 병력에서 열세인 쿠데타군에게 불리한 곳이었다. 당연히 정변 세력의 반대가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 고종은 창덕궁으로 향했다. 드디어 사흘째, 청군과의 일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애써 준비한 최신식 미국 총에 탄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몇 개월 전에 미리 들여온 총을 창고에 처박아둔 탓에 총구에 녹이 슬어버린 것이었다. 총구에 낀 녹을 미처 닦아내기도 전에 청군이 들이닥쳤고, 쿠데타 군사는 기왓장을 던지며 맞서야 했다. 믿었던 일본군이 제시한 것은 겨우 쿠데타 주도 세력의 일본 망명뿐이었다. 

결국 김옥균, 서재필 등은 나무 궤짝에 숨어 일본 망명에 성공했으나, 우정총판 홍영식은 청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에서 보내는 엽서 한 장

어찌 보면 정변의 실패는 자업자득인 측면이 강하다. 일본을 너무 믿었고, 총에 녹이 슨 것도 모를 정도로 준비가 허술했다. 하지만 당시 부정부패에 찌들어 있었던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개화를 통해 자주독립을 추진하겠다는 명분만은 확실했다. 이들은 젊었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민중은 본능적으로 일본을 불신하고 있었다. 이들의 정변 소식이 알려지자 성난 군중이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진심’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설상가상 온갖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고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정치판에선 더 말할 것이 없음을 이들 젊은이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갑신정변 직전의 개화당 사진. 2013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나무 궤짝에 숨어 일본으로 망명한 이들은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 김옥균은 그로부터 10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끊임없이 테러 위협에 시달리다 결국 상하이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고국으로 돌아온 시체는 다시 부관참시되어 팔도에 효수되는 비운을 겪는다. 갑신정변 당시 스무 살로 급진 개화파의 막내였던 서재필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되었다. 그 후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을 만들고 만민공동회를 여는 등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애썼지만 결국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모국어를 잊을 정도로 철저한 미국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후, 우정총국 또한 폐쇄되었다. 

그 뒤로 이 건물은 학교로 쓰이다가 1972년 체신부에서 인수하여 ‘우정총국체신기념관’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2012년 8월 새 단장을 마치고 체신기념관이자 우체국으로 다시 업무를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었던 우정총국이 중단되었던 우편 업무를 128년 만에 다시 시작한 것이다. 

시내를 지나는 길에 잠시 짬을 내 우정총국에 들러 오랜만에 엽서 한 장을 부쳐보는 것은 어떨까? 100여 년 전 신념에 불탔던 젊은이, 혹은 그들처럼 뜨거웠던 젊은 시절의 나에게 말이다. 

INFO.
주소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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