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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서울 역사 여행] 서울 교남동 고샅길 골목과 성곽 길 지나며 숨은 역사와 문화 찾기
[서울 역사 여행] 서울 교남동 고샅길 골목과 성곽 길 지나며 숨은 역사와 문화 찾기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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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서울 교남동 고샅길 전경.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 = 서울] 최근 걷기 여행이 인기를 끌면서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여러 코스가 소개되고 있다. 올해부터는 서울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걷기 길이 열릴 예정이다. 이름하여 종로 고샅길. 전통과 역사, 문화와 서민의 애환이 속속들이 배어 있는 종로의 고샅길 중에서 역사와 문화 기행 코스로 알려진 교남동 코스를 미리 걸어보았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 내려 돈의문 터로 향한다. 거창하게 무슨 이정표가 있는 터를 생각하면 쉽게 찾지 못한다.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돈의문이란 이름조차 생소할뿐더러 그것이 정동사거리에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이가 많을 것이다. 다만 강북삼성병원 앞에 벽처럼 꾸며진 조형물을 확인하고서야 그곳이 돈의문 터인지 알게 된다. 

돈의문은 서울 사대문 중 서대문이다. 우리는 2년 전 남대문인 숭례문을 잃었지만, 그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외세에 의해 서대문을 잃은 치욕스러운 역사가 있다. 태조 5년(1396년)에 세워진 ‘서전문’을 세종 4년(142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 바로 돈의문이다. 당시 새로 지은 문이라 해서 ‘새문’, ‘신문(新門)’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때문에 현재도 ‘신문로’와 ‘새문안’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경교장 내에는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쏜 총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돈의문은 1711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불에 타 재건되었다. 그렇게 전쟁까지 겪어낸 돈의문이건만, 1915년 전차궤도 복선화 사업을 이유로 일제에 의해 허망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돈의문에 최근 기쁜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서울시에서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로 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도와 일제강점기 때의 지적도 등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의해 돈의문의 모습뿐 아니라 주변의 지형까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라 하니 조만간 다시 태어난 돈의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하다.

돈의문 터를 살펴보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현대식 건물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옛 건물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이었던 경교장이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 2층으로 가라는 이정표가 바로 보이는 덕분에 이리저리 헤맬 염려는 없다. 

빨간 벽돌로 아기자기하게 지은 홍난파 가옥. 사진 / 손수원 기자

1945년, 해방과 함께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선생은 이곳을 숙소와 집무실로 사용했다. 선생은 이곳에서 임시정부 국무회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했으며, 남북 정치 지도자 모임도 이곳에서 추진했었다 한다. 안타깝게 1949년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하기 전까지  경교장은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한 공간이자 대한민국을 만든 터라고도 할 수 있다. 

집무실 안에는 <백범일지> 영인본을 비롯해 선생과 관련된 자료들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안두희가 선생을 암살할 당시 서 있던 위치를 표시해둔 발자국과 유리창에 남은 총탄 자국이다. 복도의 의자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던 선생을 향해 안두희는 네 발의 총을 쏘았고, 두 발은 선생을, 빗나간 나머지 두 발은 유리창을 맞췄다. 

그러나 현재 총탄의 흔적이 뚜렷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병원 주차장뿐. 하지만 선생이 암살당한 그날, 저곳에선 수백, 수천 명의 시민이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벽난로와 피아노가 놓여 있는 아늑한 홍난파 가옥 안의 모습. 사진 / 손수원 기자

경교장을 나와 서울시교육청 방향으로 나 있는 송월길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걷기 여행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제부터 줄곧 인왕산 정상을 올려다보며 걷는 가파른 길이 이어져 옆구리가 살살 당겨와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크게 숨을 내 쉰다. 

그렇게 걷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홍난파의 집’이란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골목으로 방향을 잡는다. 한층 더 길이 가팔라진다. 골목이라곤 하지만 차 두 대가 비켜 지날 수 있는 이면도로라 호젓함은 덜하다. 이미 이곳에서도 기와집보다는 붉은 벽돌의 빌라가 더 많이 보인다. 남의 동네에서 내 기분에 맞는 운치를 바라는 것도 좀 얄밉지 싶다. 그래도 왼쪽으로 서울 시내의 모습이 발아래로 펼쳐져서 은근히 등산하는 기분이 든다. 길 오른쪽으로는 허리가 잘린 서울 성곽의 잔해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현재 서울 성곽은 온전치 못하다. 

남산을 비롯해 동대문과 인왕산 등에서 성곽은 이어지지 못하고 곳곳에서 유쾌하지 않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돈의문 복원과 함께 서울에 있는 7개 구간의 성곽 복원도 이루진다는 것이다. 그 길이만 2,175m. 이제껏 이 길이만큼의 역사를 잊고 살았던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450살도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 권율 장군의 집터이다. 사진 / 손수원 기자

골목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붉은 벽돌에 담쟁이덩굴이 예스럽게 덮인 홍난파 가옥과 만난다. 2층의 서양식 건물로 지어진 집은 한눈에 보기에도 참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아마도 1920, 30년대에 서양의 선교사가 지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당시 양옥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어 근대문화유산 9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집에서 홍난파 선생은 1935년부터 1941년 작고하기까지 6년간 살았다. 

홍난파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니 선생이 쓰던 피아노가 보인다. 자그마한 벽난로 옆에서 피아노를 치며 ‘고향의 봄’이며 ‘봉선화’ 등을 작곡했을 것이다. 선생이 그린 악보도 유리 안에 잘 전시되어 있다. 지금은 집을 고쳐 소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벽 아래엔 봉선화를 심어 봄이면 아이들이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며 노래를 불러보는 체험장 역할도 한다.

성곽길을 오르다 바라본 서울 전경. 사진 / 손수원 기자

홍난파 가옥에서 나와 오던 길을 계속 걸어 100m 쯤 가면 하늘을 뒤덮을 듯 위용이 당당한 은행나무 한 그루와 맞닥뜨리게 된다. 지도에는 이 나무를 표식으로 이 근처가 권율 장군의 집터로 알려졌다. 

어른 서너 명이 둘러싸야 다 품을 수 있을 만큼 굵은 기둥도 대단하지만 하늘을 가리고도 근처 집 몇 채를 다 가려버린 줄기와 이파리도 대단하다. 수령만 420여 년. 이렇게 오랜 세월 마을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니, 행정지명까지 교남동에서 분리되어 행촌동(杏村洞)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행촌동 1번지는 다름 아닌 이 은행나무다. 사실 권율 장군의 집터가 행촌동 1번지이나 지금은 그 흔적이라 봐야 작은 비석 하나가 다이니 400여 년을 넘게 이 자리를 지킨 은행나무에 양보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은행나무에 한눈이 팔려 그냥 나무만 보고 돌아선다면 구경거리를 하나 놓치게 된다. 은행나무 맞은편에 서 있는 서양식 붉은 벽돌집이 바로 그곳이다. 현재도 사람이 사는 듯 장독이며 빨래가 널려 있으니 그냥 오래된 집이려니 싶지만 알고 보면 이 집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다.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장소인 딜쿠샤. 사진 / 손수원 기자

이 건물은 ‘딜쿠샤(DILKUSHA)’라는 이름을 가진 건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3·1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렸던 UPI 통신사 특파원 알버트 테일러가 살던 집이다. 이 집은 그가 1923년에 우리나라에 와 지은 집으로, 2층으로 통하는 계단과 방문, 아치형 창틀 등 서양식 건축물의 구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알버트는 1942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는데, 그 이후 이 집의 내력을 아는 이는 없었다. 

이 건물이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2006년 알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한국을 방문하면서부터. 하지만 지금도 명목만 국가 소유일 뿐 근대문화유산이라든가 어떠한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아 관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사람이 들어와 사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관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듯한 모습이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홍난파 가옥의 상태와는 너무나 차이가 나 안타깝다. 

산성을 옆에 두고 걷는 좁은 골목길. 사진 / 손수원 기자

은행나무 뒤편으로 난 샛길을 따라 나가면 넓은 사거리가 나온다. 확실한 이정표는 ‘할머니슈퍼’. 시원한 음료수 하나를 사 마시고 바로 이어지는 역사탐방 길로 방향을 잡으면 산성 길을 걸어 인왕산의 중간지점까지 갈 수 있다. 

조금은 가파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 머리 위로는 인왕산 정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발아래로는 서울 시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중간에 산성문을 통하면 산성 안쪽의 공원 길로 갈 수 있다. 오던 길 그대로 산성 밖의 길로 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흙길을 걸으면서 산성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산성 바깥쪽의 길을 추천하고 싶다. 

조선시대 활쏘기 연습을 하던 황학정. 사진 / 손수원 기자

산성은 언뜻 보기에도 아래와 위의 돌의 색이나 크기가 달라 보이는데, 이는 세종시대에 쌓은 성곽 위에 숙종시대 구조의 성곽을 새로 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성곽의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아직은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마치 돌담 위에 시멘트 담을 얹은 듯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다. 물론 세월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때가 입혀지면 그 이질감은 줄어들 테지만 그때까지는 이 생소함을 마냥 즐겁게 바라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산성과 길섶의 갈대들이며 야생화들을 나란히 하며 약 600여m를 걸으면 다시금 아스팔트 길과 만나게 된다. 왼쪽으로 가면 국사당과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사직공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인왕스카이웨이’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단군성전을 지나 사직공원을 가로질러 황학정(黃鶴亭)까지 갈 수 있다. 등산을 원한다면 국사당 방향으로, 역사·문화 기행을 마무리 지으려면 사직공원 쪽으로 가서 나머지 명소들을 둘러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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