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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옛 마을] 돌담길 따라 솔솔 풀려나오는 재밌는 옛날 이야기, 경남 산청 남사마을
[옛 마을] 돌담길 따라 솔솔 풀려나오는 재밌는 옛날 이야기, 경남 산청 남사마을
  • 송수영 기자
  • 승인 2010.0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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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남사마을. 사진 / 송수영 기자

[여행스케치 = 산청] 공자의 고향 마을에 비견되며, 풍수지리적으로 반달형 길지라는 터 덕분인지 ‘경북에 안동 하회마을이 있다면 경남엔 산청 남사마을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반이 많기로 유명한 곳. 덕분에 오늘날까지 40여 채에 이르는 전통한옥과 운치 만점의 돌담이 그대로 남아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을 선사한다. 

에헴~ 이리 오너라   

한적히 돌담 사이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는데 저 멀리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마을 어르신인 모양이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더니 총총히 가던 걸음을 늦추며 말을 거신다.  
“어데서 왔나?”
“서울에서요.”
“혼자?”
“네.”
“아이고야, 멀리서 왔데이. 머 볼 끼 있드나?”
“돌담이랑 한옥이 예뻐서 이제 올라가야 하는데 자꾸 보게 보네요.”
할머니의 얼굴에 이내 함박웃음이 퍼진다. 

빗장. 사진 / 송수영 기자
중문. 사진 / 송수영 기자

“고마 마을이 돈이 많지 않아서 그릇치, 차~암 좋다. 저짝 최씨 고가도 좋고, 사양정사(泗陽精舍)도 을매나 좋노. 내도 여 오십 년 넘게 살았지만 작년에 사양정사 첨 가봤다 아이가. 참말로 잘 맹그렀드라.”
“한 동네 사시면서 왜 여태 못 보시고 작년에 처음 보셨어요?”
“어데, 타성 집에 맘대로 갈 수가 있나? 작년에 큰 행사하는 바람에 함 봉기지.”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다. 시집 와서 50여 년 이 동네 살면서 지척에 있는 마을의 유명한 유적을 작년에야 처음 봐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이유가 ‘타성’ 집이기 때문이라니….

그림. 사진 / 송수영 기자

후에 이 마을의 문화해설을 하시는 정구화 선생께 여쭤보니 “예전엔 타성(他姓 : 자신과 다른 성의 사람. 이 마을엔 진양 하씨, 밀양 박씨, 성주 이씨 등이 대표적이다) 집에 가려면 미리 말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남자들도 그런데 여자들은 아예 힘든 거지” 한다. 하지만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어떻게 작년에야 볼 수 있었을까? 

“양반들은 원래 마실을 안 다녀요. 이 마을이 마실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불과 최근 10년 안쪽이란 말이죠. 지금이야 체험마을로 유명해져서 관광객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이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고, 또 농사짓는데 모르는 외지 사람이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면 욕하고 그랬을 정도니까….”

불과 10년 전이라고 하면 2000년대라는 얘긴데, 맙소사!

골목길. 사진 / 송수영 기자

양반가 생활을 들춰보다 
지리산 길목의 남사마을엔 전통한옥 40채가 아직도 짱짱하게 남아 있다. 여기에 2006년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돌담길은 고즈넉한 마을의 품격을 한층 높인다. 자칫 한옥마을이 겨울엔 을씨년스럽게 보일 수 있음에도 유독 안온하게 느껴지는 것은 긴 돌담의 황토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스한 시각적 온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산청의 자랑이지만, 국가적으로도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였다. 정구화 선생도 그런 점을 의식하셨는지 해설을 하기에 앞서 이 마을이 2005년 농촌어메니티 공모전에서 예쁜 마을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며, 일본의 NHK TV에서 ‘한국의 미’라는 주제로 방영되었다는 것을 은근히 언급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돌담을 구경하는 사이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고택인 최씨 고가 앞에 다다랐다. 빼꼼이 문이 열려 있다. 
“지금은 이렇게 문이 열려 있지만 옛날엔요, 꼭 문이 닫혀 있어야 해요. 그리고 앞에서 안의 사람을 불러서 열어주어야 들어가는 거지요.”

방울. 사진 / 송수영 기자

현재 여행객들을 위해 제한적으로 공개되는 최씨 고가는 1920년대에 지은 집으로, 꽤 부유했던 덕분에 사용된 나무가 건재하고 장식도 세련됐다. 
“여기 문 좀 봐요. 이걸 빗장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죠.”
“어머 거북 모양이네요?”
“거북이 우리나라에선 부귀와 장수를 의미하잖아요?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복을 많이 받길 바라는 주인장의 마음이죠.” 

가옥은 사랑채 뒤로 안채와 익랑채가 ㅁ자 형태로 배치된 전형적인 남부 양반 가옥의 구조다. 사랑채에서 뒤 안채로 들어가려면 좌우 중문을 거쳐야 하는데, 오른쪽 문은 집안 잔치가 있거나 나뭇짐이 들어오는 때 등 특별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열지 않는다. 통행은 주로 왼쪽 문을 이용하는데, 이마저도 문을 열면 작은 담이 앞에 ㄴ자로 막혀 있어 시야를 가린다.  

채마밭. 사진 / 송수영 기자

“옛날에는 자기 집이라고 해도 남자가 시도때도 없이 안채를 드나들 수 없었어요. 이 문 앞에서 하다못해 ‘에헴’하는 정도의 인기척을 한 뒤에 들어오라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안으로 갈 수 있는 거지. 안채엔 여성들만 사니까 배려를 하는 거요.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인데 위쪽에서부터 항렬이 높은 어른이 묵으시고 이 아래쪽엔 갓 시집온 새댁이 차지하고. 이렇게 옛날엔 남자 여자 따로 잠을 자요. 그럼 애는 어떻게 낳았을까? 어른들이 잡아주는 날에만 합방을 할 수 있는 거지. 허허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하잖아요. 실제로 남자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엄마 품을 떠나서 저쪽 사랑채로 옮겨가요. 요즘 같으면 일곱 살짜리는 마냥 애로만 보는데 어림없는 얘기지. 안채 저 대들보 밑에 방울 보이죠? 저게 지금은 녹이 슬었지만, 옛날엔 사랑채로 줄이 연결돼서 손님이 오시거나 하면 끈을 잡아당겨요. 방울이 울리면 안채에서 여자들이 상을 준비하고…. 여자는 시집 오면 요 사랑채 공간 안을 웬만해서는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친정의 일 때문에 웃어른에게 허락 받은 때를 제외하면…. 그것조차 몇 번 안 되지. 그런 여자들에게 안채 옆 채마밭은 유일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공간이야. 풀 뽑고 하려면 치마도 좀 걷고 옷도 꼭 갖춰입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여기는 절대 남자들이 못 들어와요. 엄격한 금남의 구역입니다.”
그러니까 50여 년 사시면서 동네 사양정사를 작년에 처음 구경하셨다는 동네 할머니의 일은 그 위 시어머니가 사셨을 세상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놀라움도 아닌 셈이다. 

안채. 사진 / 송수영 기자

“사랑채 앞에 있는 화장실 좀 봐요. 이 집은 화장실이 이렇게 계단을 올라가서 이층에 만들어져 있어요. 색다르죠? 더 특이한 것은 원래 이렇게 문이 없어요.”
“네? 진짜요?”
“허허허. 옛날 양반들의 담뱃대가 길었잖아요. 걸리적거리니까 아예 문을 안 단 거지.”
불과 80여 년 전에 세워진 건물인데,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이씨 고가와 사양정사 
남사마을을 유명하게 한 또 하나의 명물 풍경은 이씨 고가 앞에 있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다. 회화나무는 잘 알다시피 ‘학자수(學者樹)라고 해서 양반들만 심을 수 있는 귀한 나무였다.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나무도 회화나무라, 이사할 때도 가장 먼저 챙겼다는 귀하신 몸이다. 워낙 선비가 많은 만큼 남사마을엔 유독 회화나무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이씨 고가 앞에 있는 것은 250여 년이나 되는데다 두 나무가 서로 X자 모양으로 몸이 휘어져 풍광이 절묘하다. 

이씨 고가는 마을 안쪽에 서 있는 개국공신 교서비의 주인공 이제의 셋째 손자 사직공의 가옥이다. 현재 실제 주민이 살고 있으므로 함부로 출입을 할 수가 없고, 올 하반기부터는 여행객을 대상으로 민박을 운영할 계획이란다.

화장실. 사진 / 송수영 기자

마을 할머니께서 그렇게나 칭찬하신 사양정사는 1920년대 포은 정몽주의 후손인 정재용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아들과 장손이 지은 것으로 연일 정씨 문중의 재실로 이용된다. 가문의 위엄을 상징하는 듯 높은 솟을대문이 당당히 카리스마를 뽐내며 서 있다. 방과 대청은 분합문(分合門)으로, 평시에는 미닫이문으로 이용하다 제사나 행사가 있을 때는 천장에 있는 고리에 껴서 얹는다. 한옥의 유연한 개방성을 엿볼 수 있는 장치다. 시인 강희근 선생이 ‘마을을 오래전에 떠나버린/ 조선 선비 의관이 든 상자 하나/ 달구지 위에 실려 돌아오고 있다’라는 구로 시작하는 <사양정사 마루에 앉아>라는 시를 읊은 바 있다. 이곳은 바로 문화해설사로 안내를 해주신 정구화 선생의 댁이기도 한데, 현재 한옥민박집을 함께 겸하고 있다. 

그 외 마을엔 밀양 박씨 문중의 서재인 니사재와 이동서당 등이 있고, 700년 된 매화나무 등 문화유적들이 짱짱히 남아 있다. 마을을 돌아 흐르는 사수천 변 큰 바위에 10년 전부터 홀로 외롭게 사는 재두루미를 만나는 것도 작은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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