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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빈티지 여행] 논산 강경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읍내 전체가 생활사박물관이지유~”
[빈티지 여행] 논산 강경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읍내 전체가 생활사박물관이지유~”
  • 최혜진 기자
  • 승인 2010.03.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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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 사진 / 최혜진 기자

[여행스케치 = 논산] 근대문화가 꽃피웠던 자리는 이제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건축물이 남아 옛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꼿꼿하게 지켜온 강경 읍내 6곳의 건축물을 지도 위에 올려놓으니 훌륭한 근대문화유산 답사 코스가 됐다. 비릿한 젓갈 냄새가 풍기는 골목을 따라 근대문화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한적하지유. 옛날엔 저짝 아래 북옥리 갑문에 파시(어선과 상인 사이에 매매가 이루어졌던 바다 인근의 장. 규모가 커짐에 따라 선원을 상대로 한 음식점, 숙박지, 술집 등이 생겨났다)가 서면 사람들이 엉켜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슈. 시장에는 항시 상인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구, 생선이며 물자들이 쉴 새 없이 오고 갔지유. 여관이며 술집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말할 것도 없구유. 유동인구가 10만여 명 쯤 되었으니께… 그때는 참 대단했지유.” 

강격역을 나와 강경상업고등학교로 향하는 길, 류제협 문화관광해설사가 번성했던 강경의 과거를 회상한다. 일제시대 강경은 북쪽으로 공주, 동쪽으로 충주, 남쪽으로 익산과 전주를 아우르는 교통의 요지였다. 웬만한 해산물이나 물자가 강경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른 도시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13년 지어져 근대문화유산 제324호로 지정된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강경 읍내 골목길은 비교적 경사가 적어 자전거로 근대문화답사를 하기에도 적당하다. 사진 / 최혜진 기자
1913년 지어져 근대문화유산 제324호로 지정된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강경 읍내 골목길은 비교적 경사가 적어 자전거로 근대문화답사를 하기에도 적당하다. 사진 / 최혜진 기자

하지만 더 이상 뱃길이 중요한 교통수단이 아니게 되면서 자연히 강경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지난날의 영화는 그저 옛 이야기일 뿐, 이제 강경 시내는 부흥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만 감돈다. 그나마 15~20년 전부터 대형 젓갈 상점이 골목 구석구석까지 불어난 덕에 젓갈을 사러 온 손님들이 부지런히 들고 날 뿐이다. 

비릿한 젓갈 냄새가 풍기는 골목을 나와 강경읍사무소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첫 번째 답사 코스인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 관사에 이른다. 마치 아담한 정원을 보고 있는 듯 군데군데 심어진 나무 사이로 나지막이 솟은 관사는 그 자체로 소담스럽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겄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상고가 서울의 웬만한 대학보다 나았지유. 상고 나오면 곧바로 은행에 갈 수 있었는디, 당시 은행에 취직하는 게 지금으로 치면 외국계 펀드 회사 쯤은 될 거유. 그중에서도 강경상고는 부산상고나 덕수상고처럼 손꼽히는 명문 상고에 속했지유.” 

1931년 개교 후부터 1950~60년대에 이르기까지 강경상업고등학교는 서울에서까지 전학생이 밀려들 정도로 소위 ‘명문’이었다. 이처럼 학교의 명망이 높았으니 교장의 권위도 남달랐을 터. 덕분에 교장 사택으로 쓰였던 관사도 공들여 지은 흔적이 역력하다.

한옥의 지붕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것에 반해 일본 건축물의 지붕은 경사가 급해서 측면에서 보면 세모꼴이 된다. 사진 / 최혜진 기자

붉은 벽돌과 곤색 지붕이 어우러진 관사는 일본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는 지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한옥의 지붕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에 반해 일본 건축물은 지붕의 경사가 급하다. 특히나 관사의 지붕은 총 길이가 건물 전체의 반을 넘어설 정도로 경사가 심해서 측면에서 보는 지붕 모양이 정삼각형에 가깝다. 덕분에 전체적인 건축물의 모양이 통통하고 귀엽다. 다만 사람들이 줄곧 살아온 터라 이리저리 고치고 덧댄 흔적들이 남아 있었는데, 얼마 전에 복원공사를 마친 터라 지금은 옛 모습 그대로의 관사를 관찰할 수 있게 됐다.

강경상고에서 다시 강경역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두 번째 답사지인 강경중앙초등학교와 만난다. 1937년에 지어져 60년이 넘게 이어진 웅장한 건축물은 상고 관사와 마찬가지로 붉은 벽돌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다만 귀퉁이 네 곳의 기둥에 띠 모양으로 흰색 장식을 해서 단조로움을 피한 것이 돋보인다. 어느 면에서 보아도 허술해 보이는 곳 없이 다부진 건축물인데, 정문 위쪽 벽이나 맞은편 벽을 올려다보니 한국전쟁 때 포탄이 뚫고 지나간 자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역사의 중심에서 포탄을 온몸으로 받아낸 건물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마음을 짠하게 한다.

중앙초교에서 세 번째 답사지인 남일당한약방을 지나면, 옥녀봉으로 오르는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골목길에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상점과 일본 건축양식이 엿보이는 민가들이 길게 늘어서 몇십 년 전 빛바랜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길 중앙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단층 한옥 교회인 북옥감리교회가 자리한다. 이 건축물이 네 번째 답사지다.

옛 부두노동조합 건물은 한옥의 양식을 지키면서도 2층으로 건물을 올려야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쇠못을 사용했다. 사진 / 최혜진 기자

내부를 살펴보면 나무 기둥이 중심에 굳건히 자리하고, 천장은 서까래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기둥을 중심으로 커튼을 치고 남녀가 좌우를 나누어 쓰며 예배를 드렸다고 하니, 새로운 서양문물의 도입과 뿌리 깊은 유교사상이 부딪힌 과도기적 시절을 가늠해보게 된다.

골목을 따라 계속해서 위로 오르면 논산 8경 중의 하나인 옥녀봉에 이른다. 해발 44m의 낮은 봉우리이지만 갈대숲을 좌우로 거느린 금강의 물줄기와 색색이 다양한 지붕을 얹은 강경의 모습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옥녀봉에서 갑문을 거쳐 하천을 따라 내려가면 다섯 번째 근대문화유산인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에 닿는다. 은행 옆에 서 있는 큼지막한 창고를 보고 의아하던 차에 류제협 해설사가 “은행에 왜 창고가 필요했을까유?” 하고 퀴즈를 낸다. 갑작스런 질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쌀을 저장했던 곳인가…” 하고 자신 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는데, 정답은 ‘해산물 저장고’였다. 잡아온 해산물을 은행에 저당 잡히면 돈을 대출을 해주었다니 해산물이 지금의 보증인이나 주택담보물 정도는 되었던 셈이다.

옛 부두노동조합 맞은 편 벽면에 번성했던 옛 강경이 벽화로 남아 있다. 사진 / 최혜진 기자

한일은행에서 염천교를 지나면 근대문화유산의 마지막 코스인 옛 부두노동조합에 이른다. 언뜻 보기엔 한옥인데 기둥 중간에 철을 대고 쇠못으로 마감을 한 것이 한옥의 양식을 지키면서도 2층으로 건물을 올리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곳은 부두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도착하는 배들이 싣고 온 해산물들을 내리던 곳으로 건물과 마주하는 벽면에 강경 부두의 번성했던 과거가 벽화로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여그 벽화처럼 한창 때는 서해에서 잡힌 물고기의 95%까지 강경으로 흘러들었을 정도였슈. 당연히 하루에 해산물을 다 팔 수가 없었지유. 이렇다보니 보관방법이 문제였슈. 지금이야 냉장시설이 좋아 그르치 옛날에는 냉장고가 있어유? 얼음이 풍부했슈? 그런데 저쪽 건너편 염천동엔 소금이 산처럼 쌓여 있으니 해산물을 잡아 오면 소금을 팍팍 쳐서 절였던 거쥬.” 

“그 시절엔 이 나무문이 셔터 역할을 했쥬.” 옛 남일당한약방의 모습을 설명하는 류제협 문화관광해설사. 사진 / 최혜진 기자

포구의 부흥이 젓갈 산지로 이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도 140~150개 정도 젓갈 상점들이 강경 시내 곳곳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요사이 부쩍 젓갈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덕분에 시장 옆 골목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근대문화유산들까지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여그에 근대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은 것은 강경이 너무도 급격하게 쇠락한 탓이지유. 뭣을 허물고 다시 지을 여력조차 없었던 거유.”
그러니까 젓갈 축제를 열기 전까지만 해도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집들이 골목마다 그대로 남아 강경 읍내는 그야말로 ‘생활사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부흥과 쇠락의 이유가 어디에 있든 도시 구석구석에 근대문화유산이 이토록 건재한 사실은 답사객 입장에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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