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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시 여행] 대구 근대路와 청라언덕 산책
[도시 여행] 대구 근대路와 청라언덕 산책
  • 손수원 기자
  • 승인 2010.04.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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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비석.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 = 대구] 역사의 흔적을 따라갔다가 짝사랑의 사연을 엿보고 왔다면 조금 엉뚱하려나? 청라언덕 아래엔 한 음악가의 애틋한 짝사랑의 사연과 더불어 숨겨진 근대화의 장소들이 즐비하다. 동요 ‘동무생각’을 나직이 부르며 천천히 걸어보았다. 

곳곳에 역사가 가득한 근대路
“청라언덕? 그런 데가 있었나? 내는 잘 모르긋는데?”
목적지 주변까지 잘 와놓고선 정작 언덕을 찾을 수가 없다. 어디에서나 잘 보이는 높은 언덕이 우뚝 솟아 있을 줄 알았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언덕은 없다. 

“혹시 동산 말하는 거 아이가? 청라언덕은 잘 모르겠고, 저게 큰 교회 있는 데를 동산이라꼬 부르기는 한다. 암만 케도 거 말하는 거 같은데?” 
이야기를 듣고 저쪽을 바라보니 으리으리하게 큰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맞다, 건물들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유난히 교회 건물이 우뚝 솟은 걸로 보아 저곳에 언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서둘러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보도에 웬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띄엄띄엄 적힌 글자를 연결해보면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 한 편이 완성된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뜬금없이 이 시가 보도블록에 새겨져 있는 것일까. 

청라언덕 모형. 사진 / 손수원 기자

그 의문은 길가의 안내판을 보고서야 풀렸다. 이 길은 대구시에서 ‘근대路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말하자면 역사 여행을 할 수 있는 코스 중 일부이다. 그 약도를 살펴보니 이상화 시인의 고택을 거쳐 약전골목,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청라언덕까지 이어져 있다. 

하필이면 이 길에 ‘근대路’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을진대, 그것은 바로 이 부근이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이자, 3.1운동이 벌어졌던 곳,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대구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는 이 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어차피 코스를 따라가면 청라언덕까지 이르니 급할 것이 없다. 

이상화 시인의 고택으로 가기 위해 골목에 들어서니 시멘트 벽이며 녹슨 창문, 가로등 따위가 순식간에 1970~80년대의 풍경을 만들어버린다. 고개를 들면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는데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영락없는 옛 골목길이 나타난다.

짧은 골목을 지나자 광장이 나오는데,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의 고택이고, 왼쪽에 있는 것이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택이다. 원래는 두 고택이 앞뒤로 나란히 있었다고 하는데, 복원되면서 이렇게 마주보게 위치를 변경했다고 한다. 이 골목을 중심으로 계산동 일대에는 이상화, 서상돈 외에도 소설가 현진건, 시인 이효상, 작곡가 김진균, 서예가 박기돈, 서양화가 이쾌대 등이 살면서 활동했다. 

서상돈, 이상화 고택으로 들어가는 입구 골목. 1970~80년대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진 / 손수원 기자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가 말년을 보낸 집. 2008년에 지금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옛날에는 대구 중심지가 여기였어. 해방되고 나서 이 일대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살았는지 몰라. 시인도 많고 술꾼도 많고, 하여튼 사람이 많았어.”
작은 열쇠집을 하시는 할아버지는 1980년대부터 대구의 중심이 동성로로 옮겨간 거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경상감영이 이 근처에 있었고, 그 주변엔 대구읍성도 있었다. 하지만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대구읍성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사방으로 통하는 길을 낸 것이 지금의 동성로와 서성로, 북성로와 남성로이다. 성이 무너진 후 이 주변에는 다양한 골목들이 생겨났는데, 약전골목도 바로 그때 생겨난 것이라 한다.  

한약재 냄새가 가득한 약전골목을 나와 왼쪽으로 가면 오래된 성당 건물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영남에서 최초로 지어진 천주교 교회인 계산성당이다. 원래 계산성당은 1882년 프랑스에서 온 로페르 신부에 의해 지어졌는데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성당은 1902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맞은편 동산에 두 개의 첨탑이 똑 닮은 건물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이곳은 개신교인 제일교회의 본당이다. 1893년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베어드라는 선교자가 대구에 오게 되었고, 1898년에는 영남에서 최초로 장로교회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일교회의 전신인 남성정교회였다. 후에 대구제일교회로 이름이 바뀌고 동산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당시의 교회는 약전골목에 보존되어 있다. 

이상화 고택의 마당에는 시비를 세워 시를 통해 일제에 저항한 그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한 음악가의 수줍은 짝사랑 사연이 있는 청라언덕
성당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청라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인 일명 ‘90계단’과 만난다. 이 계단은 계성학교 학생들과 서문시장에 장보러 가는 사람들, 계산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오르내리던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이다. 특히 이 계단을 올라서 있는 소나무 숲은 3·1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모였던 곳으로, 이 주변의 길을 ‘3·1운동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오른쪽 벽면에서는 대구의 옛 사진과 설명을 볼 수 있다. 계단의 끝에 보이는 교회의 높은 첨탑 덕분에 이곳은 마치 중세 유럽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냥 한번 오르고 말기에는 너무 아쉬운 길, 몇 번이나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첫 번째는 계단이 정말 90개인지를 세면서 오르고, 두 번째는 벽의 전시물을 살펴보며, 세 번째는 이곳을 오르내리던 주민의 마음이 되어 올라본다.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90계단. 한적하고 고풍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영남 최초의 성당인 계산성당과 그와 마주보고 있는 대구제일교회. 뾰족한 두 개의 첨탑이 이채롭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이윽고 청라언덕에 오르니 왼쪽으로 청라언덕 기념비가 눈에 띈다. 사실 청라언덕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다. 청라언덕은 박태준이 곡을 쓰고 이은상이 가사를 붙인 <동무생각>이라는 가곡에 등장하는 장소로, 이 노래를 작사한 이는 이은상이지만 이 노래의 주인공은 작곡자인 박태준이다. 

박태준 선생은 대구 계성학교 출신인데, 그가 고등학생일 때 신명학교의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숫기가 없던 박태준은 졸업할 때까지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고, 후에 이런 사연을 들은 이은상이 이것을 가곡으로 만들어보자 해서 탄생한 곡이 바로 <동무생각>이다. 

하지만 박태준이 말하던 청라언덕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이제껏 의견이 분분했다. 계성학교 본관 건물이 청라언덕이라는 말도 있었고, 작사자 이은상의 고향인 마산에 있는 산이 청라언덕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렇게 논쟁이 되는 의견을 확실히 하고자 대구 지역 예술가와 문인들의 철저한 고증 작업을 거쳤고, 그 결과 청라언덕은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근처에 있는 이 동산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게 청라언덕을 확정하고 비석을 세운 것이 작년 6월의 일이니, 아무리 대구에 오래 산 사람이라도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한 이라면 청라언덕을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청라언덕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지내던 옛 건물이 세 곳 남아 있는데, 교회 뒤편의 이곳은 선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의료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건물. 사진 / 손수원 기자

비석을 지나면 서양식의 옛 건물이 두 채 보이는데, 붉은 벽돌과 2층의 큰 창문이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하다.이 집들은 1910년대에 지은 것으로,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 집들 덕분에 청라언덕은 더욱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집들은 현재 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누구나 안에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비석과 가까운 곳이 의료박물관이고 그 옆집은 교육·역사박물관이다. 제일교회 뒤쪽에 있는 또다른 집은 선교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그중 교육·역사박물관에 들어가 본다. 사실 전시물의 내용보다는 이 집의 외관이 가장 예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물관으로 개조한 탓에 실내는 세련된 요즘 건물의 그것이나 다름없다. 외관만큼이나 특이하고 이국적인 실내를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이다. 하지만 서양 특유의 방 구조나 계단의 모양, 2층의 중앙에 커다란 창문을 낸 것 등에서는 옛 모습이 남아 있어 그때의 방 풍경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교육·문화박물관 내에는 옛 교과서, 오르간 등의 옛 물건들과 3·1운동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2층의 커다란 통유리 방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교육·문화박물관 건물. 사진 / 손수원 기자

전시관 내에는 옛 교과서나 걸상 등 추억의 물건들과 대구의 3·1운동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작은 박물관 치고는 꽤 볼거리가 많은 편이다. 특히 2층의 역사박물관에서는 대구에서 일어난 3·1운동 당시 시민들이 행진했던 동선을 표시한 디오라마를 음성 설명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다시 밖으로 나와 의자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맞아본다. 대도시 안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아늑한 풍경에 졸음이 절로 쏟아진다. 

청라언덕은 참 작은 언덕이다. 언제 올라왔나 싶게 내리막이 있고, 언덕이라곤 하지만 경치 좋은 어느 집의 정원처럼 아기자기하다. 그리고 참으로 이국적인 곳이기도 하다. 어찌 생각하면 3·1운동과 이국적인 풍경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만들어놓은 이 풍경 그대로가 청라언덕의 본모습이다.<동무생각>의 가사처럼 봄이 되면 아름다운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작은 동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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