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중국 기행] 신들의 거처, 하늘호수 루구호
[중국 기행] 신들의 거처, 하늘호수 루구호
  • 박상육 기자
  • 승인 2009.10.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박상욱 기자
루구호 호숫가 웅덩이에 비친 모쒀족 성산. 사진 / 박상육 기자

[여행스케치=중국] 세상이 넓다지만, 오늘에야 그 뜻을 절감한다. 아무리 달려도 도무지 버스는 멈출 기색이 없다. 길 위에서 죽겠다고 했지만, 막상 그 즈음이 되니 절대 죽고 싶지 않아졌다. 그 사경 끝에 루구호에 닿았다. 

사진 / 박상욱 기자
파란 하늘에 선명한 사원의 붉은색. 그 대비가 실로 눈부시다. 사진 / 박상육 기자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버스
차마고도는 높은 산줄기를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눈길 닿는 곳마다 펼쳐지는 고산지대의 장관에 탄성을 지르느라 진력이 날 즈음 차멀미와 가벼운 고산증세가 찾아왔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차는 점심을 먹느라 한 번, 생리현상을 해결하느라 두어 번 멈춰 선 것 말고는 앞만 보고 계속해서 내달렸는데도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기별이 없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떴는데 에구머니나, 어느 사이에 사위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산악지대는 해가 빨리 저문다. 게다가 해 떨어지면 곧바로 어둠이 시커멓게 몰려든다. 이 오지에 가로등이 있을 리 없다. 평소 이름 모를 산기슭에서 흔적 없이 스러지겠노라며 폼 잡곤 했는데, 오늘이 그날일 줄이야! 나는 고개를 처박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을 호명하여 삶을 애타게 갈구했다. 한때의 허풍선 치고는 죗값이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며, 다시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운운하지 않겠다며…. 그러고도 두어 시간 뒤에야 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심약한 여행자는 민박집에 여장을 푸는 둥 마는 둥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찬 기운에 뒤척이다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더라?’ 순간 어젯밤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문득 깨달았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루구호(瀘沽湖)였던 것이다. 나는 곧장 튀어나가 호숫가로 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사위는 부유스름하고 고요했다. 모든 것이 정지된 호숫가에는 버드나무 몇 그루와 낡은 통나무배 몇 척이 파도와 바람에 간간이 뒤척일 뿐이었다. 새벽 어둠이 서서히 물러날수록 호수는 그 장엄한 모습을 조금씩 허락했다. 

사진 / 박상욱 기자
사원 내 알 수 없는 탑. 티베트 불교의 분위기가 엿보인다. 사진 / 박상육 기자
사진 / 박상욱 기자
모쒀족 꼬마 아이, 활을 든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나중에 이 녀석이랑 친구 먹었다. 사진 / 박상육 기자

해발 3000m 가까이에 위치한, 여의도 면적의 열 배에 이르는 거대한 하늘호수 루구호. 이 높은 지대에 이처럼 넓은 호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주변 산맥이 둥그렇게 감싸서 거대한 물그릇을 만들었고, 오랜 세월 물이 흘러들어 채워졌을 거라고 한다. 

인간의 논리와 상상력은 이처럼 앙상하고 빈곤하다. 이곳은 하늘에서 가까운 곳에 마련해놓은 신들의 거처임에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처럼 명징하고 장엄할 수가 없다(어쩐지 어젯밤 기도발이 잘 받는다 싶었다). 멀리 산머리에서 수면 위로 따스하게 내려오는 아침 햇살에 깃든 신들을 영접하느라, 나는 한동안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시간 너머의 시간, 공간 너머의 공간, 세계 너머의 세계! 

사진 / 박상욱 기자
날렵한 기와지붕의 사원 입구. 사진 / 박상육 기자

동양의 아마조네스, 모쒀족
그리고 이 신들의 영역 한 모퉁이를 조심스레 세내어 몇몇 소수민족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머문 곳은 모쒀족(摩梭族) 마을이었다. 루구호를 따라 두런두런 모여 사는 모쒀족은 중국의 공식 소수민족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을 만큼 전체 인구수가 적다. 여행자에게는 천혜의 땅처럼 보이지만 정착민에게는 눈물겨운 고난의 땅인 듯했다. 호수는 물이 차가운 탓에 물고기가 거의 살지 않았다. 호수를 둘러싼 산들은 지형이 험해서 사냥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산과 호수 사이 자그마한 논밭에 기대어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물론 그 옛날에 대부분 남정네들은 차마고도를 오가는 짐꾼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그들의 온몸에서는 신산한 살림을 꾸려온 고단함이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초리와 입가에는 늘 잔잔하고 고요한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온갖 물질문명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늘 갈증에 시달리며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무지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호수를 닮은 사람들, 모쒀족이 애틋한 까닭은 또 있다. 모쒀족은 독특한 모계사회를 이루고 있다. 한 집안과 마을을 여성이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모쒀족은 결혼제도가 없고 필요에 따라 마음 닿는 대로 자유연애를 한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흥건한 노래와 춤을 즐긴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이가 나타나면 슬며시 다가가 옆구리를 간질이고, 상대방이 수락하면 동거가 성사된다. 

사진 / 박상욱 기자
내가 머물렀던 집의 제일 큰 어르신. 할머니는 인간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아침마다 치성을 드린다. 사진 / 박상육 기자

일종의 ‘집단미팅’인 셈이다. 동거는 여성의 집에서 이루어지며, 이 기간에도 남성은 낮에는 자기 집(어머니 집)에서 지낸다. 기간은 서로가 동의할 때까지이며, 보통 여성은 평생 동안 서너 남자와 연애를 한단다. 이들 사랑의 방정식에서 오직 하나 터부는 양다리다. 남자건 여자건 양다리를 걸치다 들키면 지탄과 따돌림을 받는다고 한다. 

당연히 남자는 여성에게 어떠한 권리와 의무도 지지 않는다.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고, 여성은 또 다른 남성을 찾으면 그만이다. 모쒀족은 원시사회 이후 사라져야 했을 모계사회의 전통을 왜 지금껏 이어오는 것일까? 그만큼 이들의 경제가 빈한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하기로는 여느 소수민족들도 만만치 않다. 어쩌면 모쒀족은 남성성과 가부장제의 모순과 허점을 오래전에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들 삶의 태도를 보면 그 가능성은 더욱 또렷해진다.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는! 감정에 충실하되 배타적이지 않는! 

모쒀족 마을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들과 함께 호수에 통나무배를 띄워 그물을 걷어 올리고, 밤의 무도회에서 춤과 노래를 즐기고, 근처 티베트 불교의 기운이 깃든 절에 들러 치성을 드렸다. 모쒀족 여인네들은 다 좋은데 사람 보는 눈이 좀 떨어진다. 내 옆구리를 간질이기는커녕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아니다, 그들의 영민한 눈에 내 안의 여성성이 도드라져 포착되었기 때문일 거다. 꿈보다 해몽! 그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