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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근교 여행] 스토리텔링 오솔길, 김포 덕포진  역사 이야기 들으며 자분자분 걷는 길 
[근교 여행] 스토리텔링 오솔길, 김포 덕포진  역사 이야기 들으며 자분자분 걷는 길 
  • 최혜진 기자
  • 승인 2010.06.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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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최혜진 기자
김포 덕포진 전경. 사진 / 최혜진 기자

[여행스케치=김포] 도시의 도로는 자꾸만 넓어지는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은 점차 사라지는 듯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발자국으로 다져진 고샅길을 그리워하고, 푸른 목장을 가르는 오솔길에서 휴식을 느끼는 모양이다.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던 김포 덕포진도 초원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이 아름다운 곳이다. '

덕포진이 자리한 김포시 대곶면은 육지의 서쪽 끝이다. 맞은편에 강화도가 아득히 보이고 그 사이엔 강화해협이 강처럼 좁게 흐른다. 육지보다 바다가 더 유용한 운송수단이었던 시절엔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중요한 군사적 요새였다. 자연히 외적들도 가장 먼저 이곳을 노렸다. 

사진 / 최혜진 기자
덕포진 언덕으로 오르는 길 곳곳에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쇄국과 개방의 갈림길에 놓였던 조선 고종 때도 미군과 프랑스군은 먼저 강화해협을 침략했다.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전이라 무기가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우리는 뛰어난 전술로 적을 물러나게 했다. 지금 덕포진에는 그때의 격전을 가늠할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덕포진 입구에 들어서자 “와” 하는 탄성이 먼저 터져 나온다. 역사 유적지라고 하기엔 너무도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 탓이다. 초록으로 뒤덮인 언덕 위에 황톳길이 굽이치고, 길에서 한걸음 물러난 잣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어 있다. 광활하고 싱그러운 초록 물결에 눈앞이 시원하다. 고창 청보리밭이나 대관령 양떼목장과는 또 다른 후련함이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싱그러운 초원을 맘껏 뛰노는 아이. 사진 / 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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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포진 전시관. 사진 / 최혜진 기자

‘덕포진’이라 쓰인 나무 팻말을 지나 자분자분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이 걸어도 꽉 찰 것 같은 좁은 흙길이다. 하지만 자동차는 물론 자전거도 지나다니지 않는, 오롯이 사람을 위한 길이란 점이 마음에 든다. 

“오솔길이 참 좋죠? 여기 역사 유적지 보러 오는 분들도 있지만, 순전히 풍경 사진을 보고 찾는 분들도 많아요. 길이 예쁘고 구간별로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죠.” 
정성스레 다듬어진 잔디밭 사이로 두 개의 길이 나란히 이어진 것도 재미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왼쪽으론 확 트인 서해가 바라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잣나무 숲의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포대는 왼쪽 길 바로 아래 자리한다. 포를 놓을 자리에 네모난 구멍을 뚫고, 주변에 돌을 쌓아 지지대로 삼았다. 여기에 짚으로 엮은 지붕까지 얹었으니 나름대로 건축물의 형태를 모두 갖춘 셈이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서해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섬이 강화도이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사진 / 최혜진 기자
잣나무 숲에서 소풍을 즐기는 가족들. 사진 / 최혜진 기자

“이곳이 ‘가’ 포대 구간이에요. 이 안에 돌로 포대를 고정시켜놓고, 저쪽 바다를 향해 포를 쐈던 거죠.” 
포대가 향하는 바다로 시선을 돌리니 물이 빠져나가 탐스러운 갯벌이 드러나 있다. 서해의 아름다움이 오롯이 느껴진다. 잿빛 바다 너머로 아득한 땅은 강화도이다. 강화도와 육지를 잇는 초지대교도 어렴풋이 보인다. 

“지금 보이는 바다가 겉으로 보기엔 잠잠해도 물살이 세기로 유명해요. 섬과 육지가 맞닿은 좋은 곳에 바다가 흐르다보니 바람도 많이 불고요.” 
안희숙 문화해설사는 강화해협을 배경으로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고 말한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 무릎을 베고 숱하게 들었던, 김포 사람들에겐 ‘콩쥐팥쥐’만큼이나 유명한 옛날 이야기란다. 이름하여 ‘손돌’ 전설의 요지는 이러하다. 

고종이 뱃사공 ‘손돌’의 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서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김포 대곶면과 강화도 사이의 협소한 해협에 닿게 되었다. 어쩐지 험한 파도가 치는 곳으로 손돌이 배를 모는 것 같아 고종의 심기가 불편했다. 수차례 뱃길을 바로잡도록 했으나 손돌은 “이곳은 원래 파도가 강한 곳이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하는 대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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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를 바라볼 수 있는 확트인 길. 사진 / 최혜진 기자

마침내 고종은 손돌이 수를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그를 죽이라 명했다. 손돌은 죽음을 앞두고 바가지를 띄우며 “이것만 따라가시라”고 당부했다. 이후 왕의 배는 손돌의 바가지를 따라 험한 협류를 무사히 빠져나왔고,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그의 넋을 기리는 사당을 세웠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있는데, 해설사가 “저쪽 오솔길 끝에 손돌의 묘가 있어요”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손돌의 묘까지 가는 길은 ‘나’포대와 ‘다’포대를 지나야 한다. ‘나’포대에 이르면 잣나무 행렬이 끝나고 언덕 아래로 농지가 펼쳐진다. 밭일을 하고 있던 농부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든다. 지금 그대로의 소박한 풍경도 좋으련만,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하니 얼마 후면 이마저도 보지 못할 귀한 풍경이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언덕길에서 내려오면 포대 안쪽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사진 / 최혜진 기자
파수청 안에서 화덕을 피운 자리. 사진 / 최혜진 기자

오솔길은 푹 꺼졌다 다시 솟아나기를 반복하면서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다’포대에 이르자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한다. 바로 앞의 두 포대와 달리 기왓장을 지붕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발굴 당시 나온 유물을 토대로 재현한 것으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는데 지어진 시점이 다른 것인지, 다른 의도가 숨겨진 것인지 퍽 궁금하다. 

‘다’포대에선 파수청이 가깝다. 파수청은 포대에 공급할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로 화덕을 피운 자리가 남아 있다. 특히 ‘가’포대와의 거리가 만만치 않은데, 불을 붙인 포탄을 들고 부지런히 오솔길을 오갔을 장병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니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파수청을 지나면 마침내 ‘손돌의 묘’에 이른다. 여기까지 왔으면 덕포진 오솔길을 모두 걸어온 셈이다. 바다와 맞닿은 길 끝엔 철책선이 어지럽게 쳐져 있다. 요즘처럼 분위기가 뒤숭숭할 땐, 저 바다 너머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다시 돌아가는 길은 곳곳에 놓인 벤치에서 쉬어가며 느릿느릿 산책해볼 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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