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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인문학여행] 우리는 각자의 집에 산다 창신동 골목여행
[인문학여행] 우리는 각자의 집에 산다 창신동 골목여행
  • 임요희 여행작가
  • 승인 2022.03.14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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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기념관 내부. 사진/임요희 여행작가

 

[여행스케치=서울]서울 구도심으로 분류되는 종로구 창신동은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가로 손꼽히는 박수근과 백남준이 각각 유년기와 성년기를 보낸 곳이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 ‘박수근’과 가장 탈한국적인 예술가 ‘백남준’이 예술적 상상력을 길어 올린 창신동의 낡은 골목을 걸었다.

집이란 무엇일까. 단지 잠자고, 밥 먹고, 공부하고, 책 읽고, TV 보면서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즐거움으로 가득 찼던 여행지에서 돌아와 기껏 하다는 말은 “집이 최고다!”라는 말이다. 집이 무엇이건대 이 같은 안락과 평안을 제공하는 것일까.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가 박수근, 백남준 두 사람의 집은 근거리에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와 가장 탈한국적인 예술가가 예술적 상상력을 길어 올린 곳이 동일하게 ‘종로구 창신동’이라는 사실이 꽤 의미심장하다.

동묘역 6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박수근 집터 안내판이 있다. 사진/임요희 여행작가

바라만 봐도 사랑스러운 집

“하루는 좀 일찍 들어오시더니 ‘나는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 우리 집 용마루만 보아도 집이 어떻게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뭐가 그렇게도 사랑스러우냐고 하였더니 ‘먼발치에서 우리 집을 바라보면, 저 집 안에 죽었다 살아온 나의 사랑하는 처자식과 동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다.’고 하셨다.” 박수근(1914∼1965)의 아내 김복순 씨는 ‘나의 남편 박수근과의 25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박수근에게 집은 특별한 존재였다. 국내 화단의 거장 박수근 화백은 강원도 양구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집안 형편상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터득했다.

당시의 주택가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창신동 골목. 사진/임요희 여행작가

26세에 결혼하여 평안남도 도청 서기로 일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공산 치하에서 목숨이 위태롭게 된 그는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그런 식으로 가족과 영영 생이별을 한 사람들이 숱했다. 잠깐 몸을 피신한다는 것이 30년이 되고 50년이 되곤 했다. 그러나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 씨는 용감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남편을 찾아 서울로 왔다. 어렵사리 한강 도강증을 구한 후 자식 둘을 데리고 그야말로 사선을 넘어 남편 곁으로 온 것이다. 박수근이 집만 바라봐도 사랑스러웠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박수근 집터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임요희 여행작가

창신동 골목에는 아이들과 어머니가 있다

가난한 화가는 해질 무렵이면 골목 어귀로 나갔다. 행상 나갔다 돌아오는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박수근 대표작 중 하나인 <골목안>은 아내를 기다리면서 바라본 창신동 골목을 그린 것이다. 지금은 큰길이 뚫렸지만 1950년대의 창신동은 아이들이 뛰놀고, 아이 업은 아주머니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던 평범한 우리네 마을 골목이었다. 서울 구도심은 양면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차가 지나다니고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는 대로변에서 한 뼘만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전쟁 직후의 주택가 풍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백남준 집터에 건립된 ‘백남준 기념관’. 사진/임요희 여행작가

캐딜락 타고 유치원 가던 금수저

창신동에는 화가 박수근도 살았지만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1932~2006)도 살았다. 백남준은 국내 최초의 재벌 기업인 ‘태창방직’의 총수 백낙승 씨의 3남 2녀 중 막내였다. 백남준은 서울에 딱 두 대 밖에 없던 캐딜락을 타고 유치원에 등원하던 그 시절 최고의 ‘금수저’였다. 그가 살던 창신동 집은 ‘큰 대문 집’으로 불리던 대저택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외무대신이 살았다는 이 커다란 집에서 백남준은 5세부터 18세까지 13년을 살았다. 앞뒤로 마당이 넓었고 집 뒤에는 동산이 있어 아이들 놀기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가족은 모두 피난을 가고,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해 있던 백남준만 홀로 남아 집을 지켰다. 하지만 북한군이 그가 기르던 개를 잡아먹어버리자 그 즉시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상을 깨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도쿄대에서 음악사와 미술사를 전공한 뒤 다시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백남준은 세계가 알아주는 행위 예술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가 되었고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백남준의 뉴욕 소호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  사진/임요희 여행작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1만㎥에 달하던 대저택은 전쟁 통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땅도 조각조각 나뉘어 매각되었다. 서울시는 2017년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백남준의 집터에 있던 작은 한옥을 매입, ‘서울시립미술관 - 백남준 기념관’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대로에 면해 있던 ‘큰 대문’ 자리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섰기 때문에 백남준 기념관을 방문하려면 골목 안쪽으로 들어와야 한다. 백남준 기념관은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이다. 이곳에 비치된 리플릿에는 “기억을 서로 나누고 그로부터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는 기억 발전소로서 백남준의 지속적인 현재화를 추구한다”는 말로 기념관을 소개하고 있다. 기념관 입구는 카페로 운영되며, 마당에는 그를 기리는 설치작품이 자리 잡고 있다. 복도를 따라 내부로 진입하면 백남준 예술의 근간이 되는 다양한 연결점을 재구성하여 전시 중이다.

백남준 버추얼 뮤지엄의 일부. 사진/임요희 여행작가

‘TV경-자화상’, ‘테크노 부처’ 등의 작품과 백남준의 책상, 뉴욕 소호의 작업실 등을 만날 수 있으며, 거실 공간에 마련된 ‘백남준 버추얼 뮤지엄’은 백남준의 무한대 시공간을 구현한 가상 박물관으로 기능한다. 이곳에서는 6개의 멀티스크린 패널과 아날로그 TV의 조합을 통해 지속 가능한 아카이브를 수행한다. 각자의 세계가 모여 모두의 세계로 박수근의 집, 백남준의 집은 동일하게 동대문, 명동, 화동, 정동으로 이어지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수근은 집 앞에 서 있던 헐벗은 나무와 인간의 곤고한 삶에 주목했고, 백남준은 전차, 재봉틀 같은 기계문명이 전달하는 시청각의 신비에 심취했다.

베트남식당 '포홍'의 대표메뉴 ‘염소쌀국수’. 사진/임요희 여행작가

같은 창신동 골목에 살면서 어째서 한 사람은 가장 한국적인 화가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가 된 것일까. 결국 우리는 어느 공간에 있든 각자의 세계에 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최근 각 나라 노동자들이 창신동골목시장 일대 식료품점과 음식점을 커뮤니티의 중심점으로 삼으면서 네팔음식거리, 베트남 식당가가 형성되었다. 베트남 식당 ‘포홍(PHOHONG)’은 베트남인 최고의 맛집으로 꼽힌다. 이 집의 대표메뉴 염소쌀국수(1만 원)는 생소한 식재료지만 미각적으로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 밖에 TV에 여러 번 소개된 다양한 맛집은 전국구 맛집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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