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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봄맞이 여행] 봄냄새 맡으러 남쪽으로 떠나볼까, 진도 둘러보기
[봄맞이 여행] 봄냄새 맡으러 남쪽으로 떠나볼까, 진도 둘러보기
  • 구동관 객원기자
  • 승인 2004.04.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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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진도대교 모습.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진도대교 모습.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진도] 서해안고속도로는 목포에서 끝이 났다. 그곳에서 진도로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가다보니 어느덧 진도대교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의‘명량대첩’으로 유명해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斜張橋), 그 진도대교 너머로 노을이 아스라이 지고 있었다.

구슬픈 가락의 아리랑이 먼저 떠오르는 진도는 작은 섬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크기로 제주와 거제 다음이다. 섬 크기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적인 유적지도 많아 당일 여행은 어렵다. 넉넉히 돌아보려면 사흘은 족히 걸리는 곳이다. 그런 진도를 해가 지고서야 들어섰으니 마음만 급할 뿐이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날아가듯 바닷가에 모양을 이룬 굴 양식장. 2004녀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갈매기가 끼룩끼룩 날아가듯 바닷가에 모양을 이룬 굴 양식장. 2004녀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식사를 해야겠기에 ‘바지락 회’가 유명한 맛집을 찾았더니만 자리가 없어 결국 다른 곳에서 배를 채워야 했다.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고 내일 일정을 위하여 우선 남도석성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남도석성에 도착했지만 여행지로 개발된 곳이 아니어서 마땅한 숙소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집들이 불이 꺼져 있는데, 석성 앞 구멍가게만 불이 조그맣게 들어와 있었다. 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일흔은 넘었을 할머니께서 나오셨다. 민박집은 없고 가까운 곳에 공사 현장에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는 집이 있단다. 나의 고민이 눈에 보였는지 할머니는 가게 옆방에 불을 넣어 줄테니 기름값 만원만 보태서 하루밤 묵어가란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일 생각에 알람을 맞춰 놓았지만 정작 잠을 깨운 것은 가겟집 할머니의 밭은 기침소리였다. 공기가 맑다. 봄의 흙내음에 갯내음까지. 신선한 샐러드향이 감도는 듯 하다. 남도석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석성안 집들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를 돌다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과거의 현재가 현존하는 남도석성. 석성 안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과거의 현재가 현존하는 남도석성. 석성 안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고려 고종 18년(1231)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로 수도를 옮겼다. 40년 동안 전쟁을 벌였지만, 원종11년(1270) 몽골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끌던 삼별초군은 몽골에 항복할 수 없다며 전쟁을 계속했다. 그 때 삼별초군이 진도로 내려와 쌓은 성이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이다.

섬 속의 또다른 섬, 접도에서 바라본 풍경.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섬 속의 또다른 섬, 접도에서 바라본 풍경.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백제시대부터 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도석성에는  아직도 서른 채 정도의 민가가 남아 있다. 이제는 장독대와 나란히 자리 잡은 위성안테나가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보여주고 있지만. 접도로 향했다. 진도에 딸려있는 섬 속의 섬. 섬 속의 섬은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 있다.  

접도까지 이제는 다리로 연결되어 승용차로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해 유배지로 쓰이기도 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유배자들의 발걸음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 햇살좋은 터에 늘어서 있는 움막이 보였다. 움막 안에서는 할머니들이 굴을 까고 있다.

접도에서 굴을 까고 계신 할머니.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접도에서 굴을 까고 계신 할머니.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할머니 하루에 얼마나 벌어요? 대중없어. 하루에 3만원도 하고 5만원도 하지, 까는 만큼 버니까.” 말씀을 하시면서도 손은 계속 굴을 까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길을 보고 있노라니 늘 마흔 나이 아들의 운전을 걱정하시는 어머님이 떠오른다.

다음 목적지는 회동. 바닷길이 갈라지는 해할 현상중에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대사였던 ‘피에르 랑디’가 진도 여행을 다녀간 뒤 프랑스 신문에 이 현상을 소개하면서부터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바닷길이 열리는 날은 한 달에 2-3번 정도. 일 년이라 해도 30일 남짓이다.

해할이 이루어지는 곳에 서 있는 뽕할머니. 진도영등제의 전설로 내려온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해할이 이루어지는 곳에 서 있는 뽕할머니. 진도영등제의 전설로 내려온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회동리 앞쪽의 섬인 모도까지 길이 2.8km정도, 폭 40m 정도의 길이 생기는데 바닷길이 열리기 시작하는 곳에 뽕할머니 동상이 서있다. 진도사람들은 뽕할머니의 간절한 기원으로 그 길이 열렸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그렇게 열린 바닷길은 ‘영등살’이며, 그 전설을 축제로 즐기고 있다.

올해 26회째인 ‘영등축제’는 5월 5일부터 사흘 동안 열릴 예정이다.회동 바닷가를 뒤로하고 첨찰산에 올랐다. 해발 485m 진도에서는 최고봉이다. 운림산방을 기점으로 왕복 두 시간 남짓의 아름다운 등산길이지만, 바쁜 시간을 핑계로 산악도로를 이용했다.

남종화의 대가 허유가 그리던 화실이 있는 곳, 운림산방이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남종화의 대가 허유가 그리던 화실이 있는 곳, 운림산방이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회동바닷가가 있는 고군면에서 운림산방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두목재에서 진도 기상대쪽으로 나있는 산악도로는 승용차로도 무리가 없다. 2km 정도 진행하면 기상대 입구.

그곳에 주차를 시키고 20여분의 등산으로 첨찰산에 올랐다. 산 정상에 서니 진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안녕’하고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산에서 내려와 운림산방을 찾았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이던 허유(1807~1890)가 노년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던 화실이 있다.

허유선생은 추사선생의 서화수업을 받고 남종화의 대가가 되었는데, 헌종의 사랑을 받아 임금의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단다. 산방 앞의 아담한 연못에는 조금 전 올랐던 첨찰산이 들어있다. 산방을 넉넉하게 감싸면서 다정하게 어울려 있는 첨찰산과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만 했다.

진도의 명물 진돗개. 진도에서는 이 품종을 보존하는 연구소가 따로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진도의 명물 진돗개. 진도에서는 이 품종을 보존하는 연구소가 따로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진도읍에 가서는 진돗개시험연구소를 둘러보았다. 진도에는 진돗개를 자주 볼 수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진돗개만 키울 수 있도록 법률로 정해져 있어 다른 종류의 개를 보기는 힘들지만 그 중 혈통 좋은 녀석들은 이 연구소에 모두 모여 있다. 평일에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진돗개의 훈련 모습도 볼 수 있다.

진도 가는 길에 바라본 풍경. 저 멀리 농르이 큰 섬을 물들이고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진도 가는 길에 바라본 풍경. 저 멀리 농르이 큰 섬을 물들이고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진도읍을 빠져 나와 벽파와 용장산성을 거쳐 진도대교로 향했다. 벽파는 명량해협의 길목이며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육지와 통하는 관문이었다. 대마도를 굽어보며 서 있는 이순신장군의 전첩비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대몽항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용장산성.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대몽항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용장산성. 2004년 4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용장산성은 남도석성과 같이 대몽항쟁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인데 성 안에서 행궁터가 발굴되기도 했다. 다시 진도 넘어 육지로 향했다. 일정은 빠듯했지만 그리운 가족을 보러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아웅다웅하기는 하지만 가족은 언제나 생활의 원천이 된다. 혼자 떠나온 여행길. ‘우리’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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