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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0월호
[가갸날, 우리말 나들이②] 영화 '말모이' 속 조선어학회 수장…언어독립운동을 펼친 한글학자, 고루 이극로
[가갸날, 우리말 나들이②] 영화 '말모이' 속 조선어학회 수장…언어독립운동을 펼친 한글학자, 고루 이극로
  • 유인용 기자
  • 승인 2019.09.05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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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전 제작 위해 우리말 모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모진 고문 당하기도
월북했다는 이유로 역사에 이름 남지 않아
사진 / 유인용 기자
이극로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어학회 수장으로서 우리나라의 첫 대규모 사전인 <조선말 큰사전>의 어휘를 모으고 우리말을 지킨 인물이다. 선생의 생가가 있는 경남 의령의 두곡마을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여행스케치=의령] 불과 8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글은 외래어, 일본어가 국어로 여겨지던 시기가 있었다. 고루 이극로(1893~1978) 선생은 우리나라의 첫 대규모 사전인 <조선말 큰사전>에 수록된 16만 개의 어휘를 모으고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을 통일해 우리말 보존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말모이>에서 배우 윤계상이 배역을 맡은 류정환의 대사다. 류정환은 한글학자 여럿을 모델로 해 만들어졌으나 해당 대사의 실제 인물은 이극로 선생이다. 경남 의령과 서울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시골에서 키운 큰 세상에 대한 염원
영화 속 류정환은 부유한 친일파의 아들이지만 조선어학회의 수장으로서 사전 편찬에 힘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극로 선생 또한 해외 유학을 마친 당대 최고의 인재로서 조선어학회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무척 가난해 글을 깨우치기부터 해외 유학까지 모든 과정을 빈 손으로 해냈다는 점이다.

경남 의령의 두곡마을. 이극로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는 마을 초입에서도 차를 타고 5분 남짓 더 들어가야 나온다. 선생이 마산에서 학교를 다니기 전까지 8남매가 복닥거리며 살았던 집이다. 그가 태어났던 1800년대 말엽에는 더욱 외떨어진 마을이었을 테지만 선생은 이 집에서 밤낮으로는 농사를 돕고 이따금씩 마을로 배달되는 신문을 읽으며 바깥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점심시간이면 빈 서당에 들어가 다른 학생들이 글자를 써 놓은 종이를 보고 홀로 글을 깨우쳤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마을 이름이 적힌 커다란 표지석 옆에 선생의 생가를 알리는 자그마한 표지석이 서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이극로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 현재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상태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생가 인근의 도로명주소 '고루로'가 적힌 팻말. 사진 / 유인용 기자

마을 입구에는 ‘한글학자 고루 이극로 박사 생가 2.5km’라는 작은 표지석이 서 있지만 막상 마을에 들어서면 아무런 표지판이 없다. 생가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선생 얼굴이 그려진 벽화 하나와 생가 인근의 도로명주소가 ‘고루로’라는 것만이 그가 살았던 동네임을 말해준다. 생가는 대들보와 마루, 우물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현재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김영곤 이극로기념사업회 이사는 “지자체에서 생가를 매입하지 못해 인근에 표지판을 세우는 등 생가 보존과 관련된 활동을 할 수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창원에도 이극로 선생의 자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선생은 16살이 되던 해에 빈 손으로 집을 나와 선교사들이 세운 마산 창신학교에서 가난한 고학생 생활을 하며 공부했다. 창신고등학교의 전신인 창신학교는 이후 자리를 옮겨 터만 남았고 마산역 인근의 마산문학관에는 이극로 선생의 선생의 자서전인 <고투 40년>을 비롯한 서적 4권만이 보관돼 있을 뿐이다.

INFO 이극로 선생 생가
주소 경남 의령군 지정면 고루로 3길 8

INFO 마산문학관
주소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노산북8길 49-1

사진 / 유인용 기자
선생이 학창시절을 보낸 창신학교는 자리를 옮겨 현재 터만 남아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경남 창원의 마산문학관 전경.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문학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이극로 선생의 저서. 사진 / 유인용 기자

대학 총장 자리를 거절하며 선택한 것
창신학교를 졸업한 이극로 선생은 서간도와 만주, 연해주를 오가다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게 된다. 선생은 대학과 독일 정부에 정식 요청해 조선어학과를 개설했고, 직접 조선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에는 조선어 사전이 없었기 때문에 선생은 한글 활자로 허생전을 인쇄해 교본으로 사용했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대학에서 조선어 강의를 하면서 사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라며 “선생은 유럽 생활 중 식민지 국가들이 강대국들에 의해 말과 문화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말을 지키는 것이 독립의 첫 걸음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따고 5~6개 국어에 유창했던 이극로 선생은 조선으로 돌아온 1920년대 말 당시 손꼽히는 인재였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대에서 총장 자리를 제의하는 등 각종 기관에서 이극로 선생을 모셔가려 했지만 모든 제의를 거절하며 그가 선택한 길은 바로 사전을 만드는 일이었다. 선생은 1929년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고 오직 사전 제작에만 몰두하기 위해 이후 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다.

처음 사전 편찬 활동이 시작된 곳은 마주앉으면 서로 코가 닿을 것 같은 단칸방이었다. 이 모습을 본 ‘건축왕’ 정세권 선생이 종로 화동 129번지의 주택을 학회에 기증했고 1층은 이극로 선생의 살림집으로, 2층은 사무실로 사용됐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조선어학회가 있던 종로 화동 129번지. 현재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제공 /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1939년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김공순 여사와 아이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사진제공 /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 유인용 기자
한글학회가 자리한 한글회관. 사진 / 유인용 기자

아쉽게도 이 조선어학회 건물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덕성여고 뒤편 골목의 ‘조선어학회 터’라고 적힌 표지석 하나만이 그곳에 조선어학회가 있었음을 대신 나타내고 있다. 조선어학회는 이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지금은 광화문과 경희궁 사이에 자리해 있다.

INFO 조선어학회 터
주소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23

INFO 한글학회
주소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3길 7 한글회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이름
영화에서 가장 분개하게 되는 장면은 일제가 사전의 원고를 빼앗고 조선어학회를 탄압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영화에서 자세히 그리지 않았지만 일제는 사전 편찬에 관여된 이들을 모조리 잡아다 잔인하게 고문했다. 이극로 선생은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물로 6년 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된다.

박용규 연구위원은 “조선어학회가 탄압을 받은 이유를 일제의 사건 조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말과 글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활동이 독립운동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강조한다.

사전 원고는 해방 후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됐다. 영화에서는 배우 유해진이 배역을 맡은 김판수가 도망을 치다 역에 숨겨놓은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재판 자료로 이송됐던 원고가 창고에 방치된 것이다. 이 원고는 1947년 ‘조선말큰사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빛을 보게 된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특별전 당시 전시됐던 조선말큰사전의 원고.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조선어학회 사건 때 탄압 받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탑.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이극로 선생의 이름이 세 번째로 새겨져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이토록 목숨을 바쳐가며 사전을 만들어낸 이극로 선생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북에 남았기 때문이다. 김두봉 선생과 함께 북에서 사전 편찬 및 우리말 연구에 힘쓴 이극로 선생은 1978년 생을 마감하고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극로 선생은 아직까지 훈장을 수여받지 못한 상태다.

대신 그의 이름이 새겨진 탑이 몇 년 전 세워졌다. 지난 2014년 광화문광장 옆 세종로공원에 만들어진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투옥된 한글학자 명단 33인 중 이극로 선생의 이름이 세 번째로 새겨져 있다. 공원 한편에 청동 재질로 세워진 탑은 세월의 흔적을 받으면서 다소 녹슬어 쓸쓸한 분위기를 풍긴다.

김영곤 이사는 “분단 이후에도 남과 북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이극로 선생이 북에 남아 한글 연구를 지속한 덕이 크다”며 “영화 <말모이> 이후 선생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고 있지만 생가 보존이나 기념관 건립 등 선생을 기리는 활동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대중들 사이에 이극로 선생의 이름이 더 알려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우리말을 지켰지만 우리의 역사는 그를 기록하지 않았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글날, 정치적 이념을 떠나 목숨 걸고 우리말을 지킨 ‘언어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할 때다.

INFO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주소 서울 종로구 세종로 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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