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제주] 큰 섬에 한바탕 큰 비가 쏟아져 내리고 이틀이 지난 날. 이 뜨거운 날씨에 아들 녀석이 군에 가기 직전 추억여행 겸 인사차 제 친구들 셋을 데리고 애비를 찾아 왔다. 반갑기도 하고, 더운 여름에 고생할 녀석을 바라보니 측은한 마음이 말도 못한다. 잘 먹여 보내야 할 텐데, 좋은 추억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지….
돈 내고 들어가는 곳이에요?
“너그들, 제주에 왔는데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어데냐?”, “아빠! 오름에도 한 곳 가보고 싶어요. 친구들에게도 오름을 보여주고 싶구요.” 이미 산적애비와 오름 여러 곳을 함께 올라본 자슥의 기특한 말이다. 하하!
“그러면 오늘은 한라산에 붙은 오름을 다녀온 뒤 돈내코에 가서 시원한 계곡물에 한번 담가보자.” “돈내코요? 거기 돈 내고 들어가는 곳이에요?” 돈내코를 처음 들어보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녀석들이 치기 섞인 웃음으로 물어온다. 요즘엔 나도 그들의 농담을 받아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 특별히 너희들은 공짜로 해주마. 하하~”
돈내코 계곡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계곡이 발산하는 강한 흡입력을 느낀다. 여느 계곡의 흔하고 음습한 기운 따위가 아니다. 이 계곡에서 전해지는 맑고 투명함은 태초의 것 같다. 청량한 음의 기운이 느껴져 온다. 원앙폭포를 향하여 녹음 우거진 나뭇길을 따라 걷노라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새소리가 우리의 입을 막는다. 딴 세상 이야기일랑은 여기 와 하지 말란다. 그러한 돈내코의 힘은 한라 영실(靈室)의 탯줄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리라.
운동을 하는 녀석들이라 자연에 대한 감흥이 덜할 것 같기도 하였는데 계곡길을 걷는 내내 녀석들은 돈내코에 든 감동을 잔잔히 뱉어내더니, 여기 원앙폭포 앞에 섰을 땐 내가 처음으로 이곳을 보았을 때보다 더한 찬탄을 쏟아낸다. 장마가 지난 물이라 혼탁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한라의 물은 땅속 깊숙한 심연으로부터 끌어올려진 것이라 더욱 푸르게 흐른다. 게다가 원래 두 줄기인 원앙폭포는 네 명의 아이들을 위하여 오늘 네 줄기 굵은 물살을 쏟아내린다.
제주에는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나 하천을 만나기가 힘들기에 제주에 와서 물이 흐르는 심산유곡을 찾아 휴양을 하고 가는 여행객들이 드물다. 이곳 돈내코도 아직까지는 제주인들만의 여름휴양지로 숨겨져 있지 싶다. 제주분들께서 이 원앙폭포를 찾는 이유는 이 계곡물의 특별한 효험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바다에서 오래도록 물질을 하며 살아오신 탓에 신경통 같은 질환이 많은 해녀분들께서는 칠월칠석날이나 백중날에 이 물을 맞으러 많이들 찾아오신다.
돈내코에 대한 어원은 분분한데 어떤 이는 이 지역에 산돼지(豚)가 많이 출몰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하기도 한다. 어느 제주 산악인에게 전해들은 설명이 조금 더 설득력있게 여겨지는데 그 분의 말씀인즉, 안동의 하회(河回) 마을을 그려보라 하신다. 하회마을은 ‘물이 돌아 흐르는 동리, 즉 물돌이 동’이란 뜻이다. 돈내코는 한라산 영실계곡에서 시작되어 남서쪽으로 흐르던 계곡의 물줄기가 이 위치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하여 흐르는 지형의 이름이라 하신다. 돈은 ‘돌다’를 표현한 약어이며 내는 말 그대로 내(川)를 뜻한다. 코는 어느 장소를 집어 이야기하는 제주말이다.
원앙폭포는 눈으로만 즐기는 폭포가 아니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 신비로운 색의 소(沼)에서 적당히 물놀이를 즐길 수 있으며 폭포 위 절벽까지 올라가 폭포를 내려다볼 수도 있다. 천지연폭포니 정방폭포니 하는 곳에선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아마도 지난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이르게 떨어지고야 만 낙엽 몇 장이 고적함을 우려내는 원앙폭포 위쪽 너럭바위 위에 다관과 찻잔을 올려놓았다. 볼레오름 정상에서 맛보려고 준비한 얼렁차였다. 오름 산행은 무산되었지만 오히려 이리 살아 흐르는 돈내코 청잣물에 와서 차는 그 진성을 우리어 낼 것이다. 심산유곡의 계곡과 청잣빛 자연에서 차를 마시는 녀석들. 계곡물에 흠뻑 젖은 자연의 모습으로 자연 속에서 자연을 마시고 있다.
한 조각씩의 토스트와 계곡라면, 그리고 두어 잔씩의 한라산 계곡주로 자연과 벗할 기운을 만들고 난 후 돈내코가 품고 있는 ‘신비의 문’ 두개를 더 열기로 했다.
“아저씨! 저 위쪽으로 폭포가 하나 더 있는데 거기가 더 좋아요”, “그래, 얼렁차 한잔씩 마시고 얼렁~가보자꾸나~.”
저 멀리 깊숙한 곳에서 떨어지는 두 번째 폭포의 물줄기가 보인다. 계곡을 따라 물을 밟으며 바위를 디디며 걸어 올라보자.
드디어 두 번째 ‘비밀의 문’ 앞에 섰다. 폭포수가 나부껴 주는 계곡의 안개는 햇살을 머금고 더욱 신묘한 분위기를 내어 준다. 원앙폭포보다는 규모가 조금 작아 보이지만 그 앞에 서면 웅장함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에 소름끼치도록 취하게 된다.
폭포의 소는 역시 사람 키의 몇 길은 되어 보이고 녹담의 하늘 물은 이곳까지 흘러흘러 머나먼 여정을 푸른 물로 쏟아 내리고 있다. 여름날 살갗을 일으키며 두 손을 모은다. 산중문답(山中問答)을 그려 낸 중국 당대의 시인 이백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녀석들이 아무도 없는 폭포와 소를 호젓하게 즐기는 동안에 폭포 위로 올라가 아이들을 바라다본다. 아이들이 참으로 티 없고 깨끗하게 보인다. 자연 속 폭포수가 떨어지는 맑은 계곡 속이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다시 육지로 돌아가 어느 곳에 있던지 이 자리에서처럼 맑아 보였으면 좋겠다. 그런 녀석들의 해맑음으로 인해 주변까지 맑아졌으면 좋겠다는 내 생각은 너무나 큰 바람일까?
돈내코 계곡에서 저렇게 꾸밈없는 아이들은 명상과 다름없다. 도시에서의 명상은 훈련을 필요로 하겠지만 대자연 속의 저 아이들에겐 저리 있는 그대로가 명상이며 수련일 것이다. 물론 조금 더 집중하여 이 계곡의 기운과 더 소통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저 아이들에겐 이것으로도 흡족하게 보인다. 폭포수로 떨어지는 하늘 물의 기운과 비밀의 문이 내어주는 영롱한 빛을 고스란히 받았을 테니.
돈내코 첫 방문에 이 자리까지 들었다면 아이들은 제주를 선택하고 돈내코는 아이들을 선택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자연과 아이들 사이에 오묘한 기운이 오고 간다.
선택의 문을 지나 또 다시 열리는 세 번째 비밀의 문이 저 가까이에서 부자를 이끈다. 조금만 더 가보자. 아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길이 먼저 가고 발길이 그리로 당겨진다. 그리로 끌리어 간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심경을 뭐라고 해야 하나.
낙수의 기운을 받은 계곡물은 청자빛 더욱 짙어져 명경지수(明鏡止水) 그 고요함과 반짝임으로 흐른다. 저 폭포물이라면 맞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폭포수 뒤로는 바위집 형태로 막혀져 있는데, 비록 그리 굵지 않은 물줄기이지만 떨어지는 물소리가 바위집 안에서 소용돌이쳐 들리니 벼락같은 물소리에 내 안의 죄 많은 것들이 놀라 혼을 잃는다. 자연의 소리로써 한번 씻기운 느낌….
물소리와 나 천지간에 단 둘만이 있는 느낌. 바위를 뚫고 떨어지는 물이 나를 뚫을 때면, 어느덧 두려운 굉음은 사라지고 고요의 한가운데에 선 채로 나는 저 청명한 씻기움의 물로써 나 아닌 나를 씻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