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영광] 비가 오는 날 포구는 혼자서 외로움을 낳고 키울 줄 안다. 파도를 찾아 먼 바다로 나갔다 돌아오는 뱃머리에도 쓸쓸함이 배어 있다. 젖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부둣가를 서성이면, 꿈꾸고 있는 포구는 생각이 산만해진다. 밀물과 함께 마음을 여는 포구는 언제나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 마음 같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들었지만 비가 오는 날 포구는 더 많은 것을 받아줄 거라는 기대를 갖고 떠났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기 전부터 창밖에는 빗방울이 변주곡을 연주하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채화를 그려 넣었다. 떠나는 사람의 마음과 비오는 날 기압의 무게는 서로 상대를 즐기며 상생의 곡선을 탄다.
서울에서 영광까지 3시간 30분쯤 소요된다는 버스기사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갇혀있는 시간이 너무 길다 생각했다. 그러나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창밖을 감상하며 안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영광IC를 빠져나와 바다를 끼고 도는 멋진 해안도로를 선물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버스는 포구까지 안내를 하지 않고 시외버스와 임무교대를 했다. 바다는 쉽게 속을 드러낼 것 같지 않았다.
법성포구까지 안내를 마친 버스는 나를 내려두고 다음 약속을 위해 급히 떠났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포구는 마중 나오지 않았다. “여기가 법성포구야” 하고 말하는 것은 굴비집 간판들뿐이다. 코를 벌름거리며 바다 냄새가 나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포구는 속에 담고 있는 것을 다 비워내고 조용히 빗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흐린 날에는 주점에 가야 선장님을 만날 수 있는지 포구에는 정박한 배들로 만원이다.
포구에서 뱃고동 소리가 사라져 버린 탓일까. 시끌시끌한 어전은 낡은 기억 속에나 있는 풍경이다. 간간이 들어오는 배들이 육지에 희망을 끌어내놓았지만 너무 빈약한 듯하다. 병어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좌판에는 여러 가지 잡어들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영광 굴비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영광굴비집 간판은 여전히 성어기를 이루고 있다. 제철이 아니라도 크기에 따라 3만원부터 40만원까지 가격이 다양하다. 칠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장대, 꽃게, 삼치, 새우 등 싱싱한 먹거리로 영광포구는 살아서 꿈틀댄다.
비오는 날 포구와 만남은 그윽한 맛이 나서 즐길 만하다. 검은 속살을 드러낸 갯벌에는 망둥어와 칠게의 달리기 경주가 한창이었다. 바다로 나간 물은 아직 서두를 이유가 없는 모양이다. 산허리를 감추고 있는 비구름은 아득한 채로 피어오른다. 흐린 기억들은 속도가 느린 것처럼 비에 젖은 포구에서 하루는 길다.
영광에 오면 꼭 들러보아야 할 곳이 있다고 귀띔을 해주던 영광함평뉴스 편집장 박청씨의 말이 생각나 백수해안도로로 흘러들었다. 백수처럼 시간의 여유를 갖지는 못했지만 여행의 맛은 다시 들르고 싶은 고향 같은 길 하나 정도는 알아 놓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치미부터 시작되는 해안 일주도로는 바다와 육지가 적당한 사이띄우기를 하고 있어 삼척해안도로와 너무 닮았다. 바다와 도로가 너무 다정해 연인들의 낭만데이트 코스로 제격일 듯하다. 이곳에서 서해의 낙조를 만난다면 마음의 고향이 될지도 모르는데…. 가랑가랑 내리는 빗줄기가 야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