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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지구촌 에스프리] 중국 둔황 명사산 공존의 지혜를 가르쳐준 모래의 바다
[지구촌 에스프리] 중국 둔황 명사산 공존의 지혜를 가르쳐준 모래의 바다
  • 정길화 기자
  • 승인 2006.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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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절대건조기후와 천연 수원이 조화되는 월아천 오아시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여행스케치=둔황]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내게 썩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막과 관련해서는 빛나는 한 대목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명대사가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우물은 말할 것도 없이 오아시스다. 생텍쥐베리의 이 한마디로 사막과 오아시스는 내게 마치 창과 방패의 모순처럼 강렬하게 인식되어 있다. 생물이 살기 힘든 척박한 지대의 대명사인 사막…. 그러나 사막은 그 속살에 오아시스를 깊이 간직하고 있음으로 해서 진정한 사막으로 완성된다. 

오아시스 없는 사막은 시쳇말로 ‘소 없는 찐빵’이다. 절대건조기후와 천연 수원(水源)의 공존은 얼마나 놀라운가. 이 경이로운 모순. 그리고 오아시스는 신기루 현상이 있기에 비로소 오아시스로 완성된다. 신기루 없는 오아시스는 또 얼마나 재미없는 것인가. 이 기묘한 공존.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실크로드의 서역남도로 가는 관문 양관. 대부분이 풍랑에 훼손되고 일부만이 남아있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이동 중 사막에 비친 낙타의 실루엣을 담아보았다. 낙타의 발자국도 함께.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큰 낙타상이 있어 금방 알아볼 수 잇는 둔황박물관 전경.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중국과 몽골 지역에 걸쳐 있는 고비 사막은 실크로드가 지나는 곳으로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 일대를 언저리라도 가려면 중국 실크로드 여행 코스의 둔황이 제격이다. 타림분지 동쪽, 고비사막 남서쪽에 위치한 감숙성 둔황의 명사산은 사막과 오아시스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안성맞춤의 코스다.

둔황을 찾은 것은 2003년 여름이었다. 베이징에서 30여 시간 기차를 타고 둔황역에 내리니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총알택시를 타고 포장이 엉망인 길을 두 시간 가까이 더 달려가야 둔황이 나온다. 오아시스가 발달해 도시를 이룬 둔황은 지난 날 실크로드가 무역의 중심이던 시대에 번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도시 한가운데 비파를 든 여인의 기념상이 있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실크로드에서 출품된 유물이 전시된 실크로드 박물관.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풍우로 사막이 벗겨지고 파괴되면서 새로운 형상이 돌출된 이단지질공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유서 깊은 막고굴(莫高窟)에 그려진 여인의 이미지다. 둔황의 남쪽 5km 지점 지척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에 바로 그 막고굴이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어 유명한 이곳이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더 중요하겠지만 나그네의 발걸음은 사막언덕으로 먼저 향한다. 명사산(鳴沙山)은 글자 그대로 모래가 바람에 휘날리며 소리내 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손으로 만지면 감촉이 없을 정도로 가늘고 보드라운 모래다. 

이 모래로 이루어진 거대한 언덕이 산맥처럼 뻗었는데 바람 방향으로는 완만하고 반대쪽으로는 날카로우면서 명암의 경계선은 생선의 등처럼 날렵하다. 명사산의 모습은 바람이 조각하는 자연적인 예술의 극치다. 황혼의 명사산 풍경이 그렇게도 좋다고 해서 그리고 저물녘에 명사산 정상에서 마시는 술이 그렇게 운치 있다고 해서 푹푹 빠지는 걸음으로 행여 때를 놓칠 새라 하염없이 모래산을 오른다. 오른발을 옮기면 왼발이 빠지고 왼발을 옮기면 오른발이 빠진다. 그러다가 주루룩 미끄러지기 일쑤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사막의 일출.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우리의 남대문 시장과 다를 바 없는 둔황시장의 거리풍경.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그런 내게 명사산은 무엇보다 겸손해져야 함을 가르친다. 평소의 섭생과 건강의 중요성도 깨우쳐 준다. 모래산의 교훈이랄까. 이미 ‘중국의 유홍준’으로 불리는 위치우이(余秋雨)가 여기를 먼저 다녀갔다. 그는 <중국문화답사기(원제는 文化苦旅)>에서 “명사산을 오르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힘을 주면 줄수록 모래산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더 많이 미끄러진다. 부드럽고 가는 모래는 아무리 밟아도 걸리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기력을 모조리 삼켜버린다. 사람은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오히려 모래는 더욱 온유해진다”며 체험담을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위안이 된다. 

그는 모래산을 오르는 자신의 발자국이 ‘끝없이 펼쳐진 주단 띠처럼 평찬하면서도 표일(飄逸)하듯 굽이치는 곡선’을 그려내는 것에 스스로 탄복하며 이미 수놓아진 곡선 때문에라도 반드시 올라갈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정상에 도착해서는 빛과 그림자가 세상에서 가장 통쾌하게 자른 듯한 선으로 나뉘어진 절경을 보고 가슴이 탁 트인다.

그리고 무슨 이유로 역대 승려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평범한 백성들이 이 사막의 모래산을 골라 막고굴과 같은 동굴을 만들고자 했는지 그 이유를 온몸으로 깨닫는다. 정말로 명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막고굴을 보면 그 말이 실감난다. 중국의 유홍준다운 설법이다. 

속인인 내게 그 정도의 법열(法悅)은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어느 여름날 더위가 가시지 않은 저녁 무렵, 땀 흘려 힘들게 명사산 정상에 오른 후 가슴 벅찬 청량함을 느끼며 저 먼 곳으로부터 육박하는 낙조를 바라보던 느낌은 지금도 삽상하게 반추된다. 기울어지는 태양빛은 사막의 구릉들을 선명한 음영으로 보여준다. 사막이 바다라면 그것은 파랑(波浪)이다. 저무는 해,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의 파도….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우리의 남대문 시장과 다를 바 없는 둔황시장의 거리풍경.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우리의 남대문 시장과 다를 바 없는 둔황시장의 거리풍경.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명사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월아천’(月牙泉)이라는 오아시스가 있다. 초생달처럼 생긴 월아천은 수천 년 동안 사막 한가운데서 한번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모래언덕과 함께 빠뜨릴 수 없는 절경을 이루고 있다. 정녕 명사산은 월아천을 숨기고 있어 아름다운 것일까.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사막은 아마도 사하라 사막일진데, 그는 언제 여기 고비 사막 언저리까지 와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탄복스럽다. 

그날 나는 철학자로 모자라 답사가가 되기로 했다. 현지 지인의 도움을 빌려 인적 없는 곳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여느 패키지 관광으로는 있을 수 없는 추억만들기다. 사막에 밤이 오니 여름이지만 오싹하다.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둔황의 별미 양고기구이에 곁들이는 백주가 일품이다. 모닥불도 사위고, 얘기꽃도 떨어지고, 쏟아지는 졸음에 모두 항복이다. 그러다가 새벽녘 엄습한 추위에 나도 모르게 일어나니 사막의 장렬한 일출이 얼굴에 사정없이 쏟아진다. 

모래언덕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니 황혼 때와는 또 다른 상념을 안겨준다. 그것은 생명과 존재에 대한 강인한 열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삶이 시들하고 진부해질 때 명사산에 올라 황혼과 일출을 보면 인생의 겸손과 열정을 겹으로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다시 그곳에 가고 싶어진다. 이즈음 내 삶이 시들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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