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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⑫] 그날 이곳에선 어떤 일이…? 중명전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⑫] 그날 이곳에선 어떤 일이…? 중명전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3.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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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헤이그 특사 위임장. 2014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조선 궁궐 어느 전각이나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정동길 작은 골목에 숨어 있는 중명전만 한 곳이 또 있을까.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던 곳. 결국은 조선의 운명처럼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이 외롭게 서 있다가 겨우 제 모습을 찾긴 했지만 여전히 궁궐 바깥, 외톨이 신세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이어지는 정동길을 쭉 따라 걷다 보면, 보일 듯 말 듯 작은 이정표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작은 이정표를 따라 좁은 골목길 안으로 몇 걸음만 걸어 들어가면, 시간을 거스른 듯 고풍스런 붉은 벽돌 건물이 고즈넉이 서있다. 오호, 이렇게 멋진 건물이 숨어 있다니! 하지만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읽노라면, 숨은 보물을 찾은 듯한 기분이 이내 씁쓸해진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현장인 동시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정동길 작은 골목에 숨어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일까?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보이기 힘든 아픈 역사의 현장. 러시아 건축가 사비찐이 설계한 중명전은 원래 대한제국 황실의 도서관으로 지어졌다. 그렇다면 왜 도서관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밀사를 파견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2014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서양식 건축양식이 확연한 중명전 실내. 2014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도서관에서 편전으로, 비극의 현장에서 전시관으로
을미사변은 아관파천을 낳고, 아관파천은 덕수궁 확장으로 이어졌다. 을미사변으로 아내를 잃은 고종은 자신도 언제 암살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고, 거기서 1년 동안 지내다 경복궁 대신 공사관 바로 옆에 위치한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덕수궁 확장 공사가 이어졌고, 그런 연유로 정동 지역 서양 선교사 거주 지역이었던 이곳에 중명전이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아직 중명전이 아니었다. 서양 건물을 선호했던 고종의 명에 의해 지어진 황실 도서관은 애당초 수옥헌으로 불렸다. 

그러던 1904년 덕수궁이 큰 불로 몽땅 타버려 갈 곳이 없어지자 고종은 붉은 벽돌 건물인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때부터 이곳은 국왕이 업무를 보는 편전이 되어 중명전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것이다. 옛날 궁궐에서 ‘~헌’으로 끝나는 건물은 왕족들이 조용히 독서를 하는 공간이었고, ‘~전’은 가장 지체 높은 왕과 왕비가 머무는 공간에 붙였다. 수옥헌이 중명전으로 바뀐 것도 이런 이유이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중명전이 신분 상승(?)을 한 바로 그 다음해, 이곳에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조선 침략을 서둘렀던 것이다. 미국과는 가쓰라-테프트밀약을 맺어 필리핀과 조선의 식민화를 상호 승인했고, 당시 세계 최강 영국과도 동맹을 맺어 든든한 후원자를 얻었다. 이제 일본이 조선을 먹어 치우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파견한 헤이그 특사는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고종의 위임장을 가지고 러시아를 횡단, 2달 만에 네덜란드에 도착한 헤이그 특사들의 외침을 세계만방 그 어디서도 들어주지 않았다. 고종의 특사들은 그곳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의 회의장 입장조차 거부당했던 것이다. 몇몇 외신 기자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2014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헤이그 평화회의 사진과 이를 풍자한 삽화. 2014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역사의 현장에서 시대의 증언을 만나다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제에게 ‘찍힌’ 고종은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불온한 일’이 벌어졌던 중명전은 덕수궁이 축소되면서 궁궐 밖으로 쫓겨난 신세가 되었고,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쓰이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9년 복원되어 현재 역사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중명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입구를 들어서면 을사늑약 전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지휘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 옆에는 고종이 영국의 신문기자에게 주었다는 친서가 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체결한 조약은 황제께서 허락하지 않았고, 서명하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을사조약은 을사늑약으로 불린다. 조약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을사늑약은 불법이고, 또한 무효라는 뜻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힘이 곧 법이 되었던 국제사회에서, 이런 불법 주장이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으니…. 이어지는 고종의 친서들 ?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당대의 강대국들에게 보낸 ? 이 한층 안쓰러워 보인다. 

2014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고풍스러운 건물 외관. 2014년 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고종의 친서들 곁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빛 바랜 사진이 보인다. 양복을 쫙 빼 입은 강대국의 대표들 사진 아래에는 예수가 회의장 문 밖에서 발길을 돌리는 그림이 있다. 당시 평화회의를 풍자한 그림들 중 하나란다. 예수도 못 들어간 회담장에 꺼져가는 등불 같은 동방의 작은 나라 특사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으랴. 이에 분개한 이준 특사가 회의장 앞에서 할복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사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오랜 여독으로 생긴 병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헤이그 특사의 노력이 빛을 바래는 것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이국만리 낯선 땅에서 이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므로.

특사들은 실패했고, 역사는 무심하게도 제 갈 길을 갔다. 고종은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되고, 대한제국은 문을 닫았다. 물론 이준을 비롯한 헤이그 특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 한 몸 던져 역사의 길을 바꾸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사방에서 의병들이 일어났고, 그중 하나였던 안중근은 조선 침략의 핵심인물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그리고 중명전은 오늘도 그 시대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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