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평창] 지금 평창은 동계올림픽 열기로 한창 달아올라 있다. TV를 통해서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도민 전체가 얼마나 열렬히 기원하는지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2014년을 향해 모아지는 사이에도, 그것과는 별개로 평창의 산과 들은 2007년의 푸르른 여름을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막 펜션 붐이 일기 시작하던 시절, 이상하게도 주변 사람들 중엔 평창을 입에 달고 다니며 그곳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그들 중 꿈을 이룬 이는 단 한 명도 없지만(무엇보다 금전적인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평창에 가본 사람이라면 도시의 샐러리맨들이 왜 그렇게 평창에 내려가 펜션을 짓고 살고 싶어 하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평창은 전체 면적의 약 65%가 해발 700m 이상이 되는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저기압과 고기압이 만나는 높이여서 기압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인간은 물론 동식물 모두가 가장 이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평창의 푸르른 녹음과 시원하게 펼쳐지는 초원 속에 있으면 그동안 더께더께 앉아있던 심신의 긴장도 서서히 풀어진다. 맛있는 공기야 얼마든지 공짜이고, 푸르고 푹신한 초원을 지친 줄 모르고 걸어 다니게 되는 곳이 바로 평창이다.
잠시 얘기가 벗어나지만 어린 시절 TV 앞에 못이 박힌 듯 꼼짝 않고 앉아 빠져들며 봤던 만화영화 중에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있다. 이모와 살던 하이디가 알프스의 할아버지 집에 처음 오던 날, 이모 몰래 거추장스런 옷을 다 벗어버리고 펄펄 뛰어다니던 하이디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푸른 초원이 내려다보이는 하이디의 이층 다락방은 또 얼마나 부럽던지. 어른이 되면 꼭 저런 집을 지어야지, 저런 집이 있는 알프스에 꼭 가봐야지 하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추억은 선명한데, 현실은 꿈을 따라잡지 못했다. 평창 삼양목장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그때의 추억이 새삼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새어나온다. 스위스의 알프스는 아니지만, 이곳 삼양목장도 참으로 감탄스럽다. 이 정도면 분명 ‘꿩 대신 닭’식의 초라한 레테르를 붙일 일이 아니다. 알프스도 좋겠지만 삼양목장도 분명 아름답고 훌륭하다.
그러나 삼양목장 아래 횡계마을에서 태어나 오십여 년을 살아온 시인 김영교 씨는 삼양목장을 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그는 이곳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의 염원이 풀 한 포기 한 포기에 다 담겨져 있는 땅”이라 말한다. “40년 전만 해도 이곳 대관령은 가난하고 못사는 화전민들이 몰려 살던 곳이었죠. 삼양목장은 우리 국민들에게 부족했던 우유와 고기를 공급하겠다는 뜻으로 일일이 사람 손으로 풀을 심고 가꾼 피와 땀의 결실입니다. 아마 이런 엄청난 규모의 목초지를 일일이 사람 손으로 개간해서 만든 곳은 아마 전세계에서 이곳 삼양목장밖에 없을 겁니다.”
삼양목장 정상의 동해전망대에 올라 그의 목소리는 한층 톤이 높아지고 힘이 들어간다. 그 말에는 아랑곳 않고 너른 목초지에는 한가로이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저 멀리에선 유유히 풍력발전기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삼양목장은 사시사철 풍광이 빼어나지만 여름철엔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인 초원이 최고의 볼거리다. 청정 지역인 만큼 삼양목장 내부로는 차를 가지고 다닐 수 없고, 입구에 세워두고 도보로 올라가거나 자체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정상인 동해 전망대까지는 도보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소와 양 방목지, 드라마 <가을동화>와 영화 <연애소설>과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지 등을 두루 거쳐간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야생화를 감상하며 유유히 산책하다보면 어느새 진짜 ‘알프스’라도 온 듯 발걸음이 가볍다.
소를 직접 모는 목동이 될 수는 없지만, 말을 직접 타볼 수 있는 승마 체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신나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두미울목장을 찾아야 한다. 이곳은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정식 경주용 말이 총 80마리나 있다. 규모면에서도 제주도의 목장을 제외하고 육지에서 최대.
사실 제주도에서 조랑말을 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이렇게 우람하고 아름다운 경주마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다. 탄탄한 근육이며 유연한 몸매를 실제 눈앞에서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처음 만난 주제에도 이놈의 등 위에 앉아 바람을 가르며 초원을 신나게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래서인지 양과 소가 노니는 목장은 태평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데 반해 말 목장은 느낌이 훨씬 역동적이다.
“말은 원래 송곳니도 없는 유순한 동물이죠. 공격적이기보다는 아주 감성적이에요”라는 이곳 목장의 주인인 정영자 대표의 귀띔.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말 앞쪽에서 천천히 다가가면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단다.
말 사육장 안으로 들어가니 아기 주먹만한(절대 과장이 아니다) 눈을 꿈벅이며 점박이 말이 낯선 방문자를 경계한다. 얼굴 한가득 점이 박힌 ‘깨순이’의 얼굴이 천진난만해 보인다. 사육장을 나오니 너른 풀밭에 경주마들이 무리지어 놀고 있다. 초여름 오후에 나른해진 탓인지 수다라도 떠는 듯 군데군데 몰려있다.
사실 처음 말을 타는 사람이라면 꿈에 그리던 환상적인 라이딩은 무리. 전문가가 옆에서 말을 제어해주며 가벼운 평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약 10분 정도 뚜벅뚜벅 걷는 정도인데도 한층 높은 곳에 앉아있으니 기분이 확실히 환상적이다. 아직도 ‘기마민족’의 피가 안에서 끓고 있는 것일까?
목장 안에는 펜션이 함께 마련되어 있어 느긋하게 쉬면서 즐길 수도 있다. 외국 산장에라도 온 듯 내부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고 고급스럽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꿈꿔보는 푸른 새벽을 말과 함께 맞는 목가적인 아침, 이곳 펜션이라면 문제없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