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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마음 산책] ‘잠시 휴대폰을 꺼두셔도 좋습니다’ 夏中 白羊寺
[마음 산책] ‘잠시 휴대폰을 꺼두셔도 좋습니다’ 夏中 白羊寺
  • 송수영 기자
  • 승인 2007.07.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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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고즈넉한 백양사 풍경.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행스케치=장성] 장성의 백양사를 둘러본 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침보다 한결 가볍다. 그러고 보니 요사이 끈질기게 괴롭히던 두통이란 놈도 어느 순간부터 잊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의 기운을 마음껏 들이마신 탓일까? 아니면 자연이 무심하게 빚어놓은 절경에 넋을 놓은 탓일까? 

“세상에 걱정 하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집도 막상 안에 들어가 보면 그렇지가 않거든요….”
개인적 친분이 있는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심방을 많이 다니다보니 자연스레 신도들의 속내도 듣게 되는데, 그래 알고 보면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욕심내서 자신을 너무 들볶지 말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했건만, 삼 일도 안 돼 금 같은 잠언은 깊숙한 심연으로 조용히 침잠해버렸다. 하루하루 먼지를 덮어쓴 채 방치되는 사이 짜증나는 일상이 슬며시 돌아왔다. 

삼각주에 퇴적물이 쌓이듯 하루하루의 시간 뒤엔 어쩔 수 없이 삶의 더께가 남는다. 머리는 무겁고, 출근길은 짜증스럽고, 얄팍한 지갑에 분통터지고, 핸드폰 벨 소리도 두렵게 느껴지는 일상…. 

그러면서 문득문득 통근 지하철 안에서 혹은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거울을 보다가, 세상을 좀 더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실은 아집만 더 강해진 것은 아닌지, 물리를 조금 깨우쳤다 생각했건만 실은 속물근성을 더 교묘하게 감추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까지 엄습한다.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절의 역사가 전해지는 부도군.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백양사를 소요(逍遙)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평일 오후, 호남선 백양사역에 내린 사람은 달랑 나 하나다. 아담하고 정감 있는 시골 간이역. 역사를 나서는데 옆집 아저씨 같이 푸근한 인상의 택시 운전사가 “어제도 그 시간에 여자 손님 한 명 내렸는데, 오늘도 한 명이네” 하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큰소리로 내지른다. 그렇지 않아도 쉽게 눈에 띄는 게 낯선 여행자인데, 휑뎅그렁한 객사 앞에 있으니 몸이 한 뼘은 더 커지는 느낌이다.   

월정사 전나무 길이 유명하다지만, 백양사로 들어가는 길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일주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간다. 가을이면 이 길가에 빽빽이 늘어선 나무들이 빚어내는 빛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행락객들이 줄지어 들어올 터. 그러나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평일 오후엔 다람쥐와 나만이 오롯이 길을 차지하고 있다. 도로도 초목도 비에 젖어 그 색이 짙어졌다. 일체 소음이 빗소리에 묻혀 사방이 고즈넉하니 발소리가 더욱 크게 울린다. 향긋한 나무 냄새, 땅 냄새에 무거웠던 머리도 조금씩 맑아지는 느낌이다. 

호남 사람들 사이에서 ‘산은 내장산이요, 절은 백양사’라는 말이 있을 만큼 백양사는 지역의 자부심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과연 혼자 고즈넉한 정취를 다 차지하기가 아까울 정도다.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고즈넉한 대웅전.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백양사는 632년(백제 무왕 33년) 여환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대웅전이 흰 바위가 유독 많은 백암산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당초엔 백암사(白巖寺)라고 했다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정토사(淨土寺)로 불리다가 조선 선조 대에 와서 오늘날의 백양사(白羊寺)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이곳에서 백연경을 설하였는데 구름같이 몰려든 대중의 무리 속에 흰 양이 있었다고 한다.

회가 끝나는 7일째 되던 날 선사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더니 “죄가 많아 양으로 태어났는데 큰스님의 설법을 듣고 인간으로 환생하게 되었습니다”라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런데 다음날 신기하게도 영천굴 아래 흰 양이 죽어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여 이를 스님이 거두어 화장을 해주게 되었고,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장맛비에 거줄마다 영롱한 구슬이 맺혔다.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이름의 유래도 그렇지만, 이곳은 유명한 선승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손에 꼽는다. <절에서 놀자, 템플스테이(랜덤하우스)>의 저자이자 여행전문가인 유철상 씨는 “호남에서 송광사가 승풍(僧風)을 이어온 곳이라면 백양사는 우리나라 선풍(仙風)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온 절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철(性澈)·서암(西庵) 등과 함께 한국 현대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유명한 서옹 스님도 바로 이곳 백양사에서 출가하시고 입적하셨다.

유철상 씨는 덧붙여서 “백양사 뒤로 산이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명당의 지세가 뚜렷해서 수행하기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정진도량으로 유명한 운문암과 약사암으로 가는 길의 운치 있는 비자림 숲이나, 쌍계루 계곡 등 한적하게 산책 수행하기 좋은 장소가 많아 이 또한 선승이 많이 모이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하안거 기간이라 절 안에선 스님의 모습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드문드문 여행객들만 바람처럼 소리 없이 흘러갈 뿐. 본디 안거(安居)의 기원이 인도에서 비를 피하다 초목과 벌레를 다치게 하는 것을 우려하여 우기 동안엔 안에서 수행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실제로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그 의미가 더 각별해질 듯하다. 

사람 없는 너른 대웅전 안에 한참을 앉아 있으니 반질한 마룻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올라와 습기로 끈적했던 몸의 피로가 한결 풀린다. 간간이 풍경 소리가 청명하게 울리고 사방의 문에서 살가운 바람이 부니 도무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한 폭의 비경을 이룬 쌍계루.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하중지담(夏中之談)
세상만물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고, 인연 역시 억겁의 연(緣)이 모인 것으로 보는 불가(佛家)이니, 단 몇 십 분이라도 마주앉아 차를 대접받는 일이 그리 가벼운 연은 아닐 게다. 이곳저곳에서 스님을 찾다 마침 승방에 계신 범천(梵天) 스님께 굳이 청하여 차 한잔을 얻어 마시게 되었다.  

스님의 방 너머로 안개가 백암산을 다 가릴 듯 너울 춤추며 흘러간다. 

중국의 한 유서 깊은 사찰 선방 입구에 ‘염불시수(念佛是誰)’라는 글귀가 붙어 있단다.‘염불하는 자, 너는 누구냐?’라는 뜻이다. 백양사에는 ‘이 뭣고’를 묻는 비가 세워져 있다. 

다 소화시키지 못할 만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정작 근원을 따지는 문제로 들어가면 답을 찾을 길이 없다. 날로 이기심은 높아가지만, 정작 ‘나’의 실체는 잊혀진다.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삼라만물이 모두 제자리가 있을진대...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우화루 앞의 울창한 보리수. 2007년 7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불가의 법도와 뜻에 문외한이니 이해해달라는 용서를 먼저 구한 뒤, 스님께 공부, 깨달음의 끝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조용히 차를 따르다 이윽고 말씀이 큰 파도가 덮치듯 쏟아지는데 미처 머리에 담기가 힘들다. “부모의 몸을 받기 이전 진아(眞我)를 밝히고 일체 혼돈을 깨쳐 만물일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여전히 어리둥절할 뿐이다. 필시 그 말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다 감당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많은 단어의 행렬이 귓전에서 꺾여 방바닥에 무수히 쌓인다.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를 이루었지만 자기의 신령스러운 마음 광명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삼계 불집 속에서 나고 죽고 하는 큰 꿈을 깨지 못하고, 긴 겁이 지나도록 갖은 고통과 쓴맛을 다 받고 있다<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한겨레신문사)>”고 하였다는데 내 속의 ‘신령스러운 마음’은 너무 닫혀 있는 것일까.

그냥 맛과 색과 향으로만 기억하라며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향기로운 차를 연거푸 마시며 앉아 있을 뿐.  

“똑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됩니다. 또 원효대사는 해골 속에 고인 썩은 오물을 단 샘물로 여기고 마셨지요. 보살님의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

지금은 하안거. 

사위는 고요한데,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두 평 남짓 선방 안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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