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변산] ‘변산바다’하면 주꾸미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래서 그가 펴낸 책 이름도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이다. 걸쭉한 전라도 입담이 봄 주꾸미 대가리에 알 차듯 통통하게 담겨 있는 이 책을 읽고 무작정 그를 만나러 그의 고향인 부안 모항으로 갔다. 봄 주꾸미 철은 갔어도 그가 이야기해주던 그 풍경은 그대로일 거란 기대를 안고 말이다.
그의 고향을 먼저 만나다
이튿날, 화창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빗방울이 굵지 않으니 장마철에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가 아니랴. 아침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는다. 오늘 부안으로 나간다는데 자신은 휴대폰이 없다며 대신 만나는 이의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사람답게 핸드폰에 번호를 꾹꾹 눌러 저장을 시키고는 이따 뵙겠노라며 전화를 끊는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하지만 한편으로 뭔가 찜찜한 기분을 거둘 수가 없는데…. 이런 환장할! 전화번호가 저장이 되지 않았다! 디지털 문맹도 아닌데 이런 중요한 전화번호를 저장시키는 데 그만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미치겠다 싶어 바로 박형진 시인의 집으로 전화를 건다. 하지만 벌써 그는 나가고 난 후, 이제 그와 연락을 할 수 있는 길은…. 완벽히 없다…. 약속 시간이 되어 그가 먼저 궁금해 하며 전화 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어제는 호우주의보, 오늘은 나의 ‘멍청주의보’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만다.
모항에 도착하여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고향을 먼저 둘러보기로 작정한다. 툭 튀어나온 모항의 젖꼭지를 칠산 앞바다에 물리고 있는 폼이 그가 쓴 책의 표지 그림과 똑같다. 몇 가구 되지 않는 집들은 거의 다 민박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작은 바닷가 마을은 남는 방 몇 개를 가지고도 민박을 친다. 그래서 어떨 때는 서울 간 주인내외의 아들 방을 단돈 3만원으로 뻔뻔하게 차지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안도현 시인은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라고 말했다. 여기가 변산의 똥구멍인지 젖꼭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고향…. 나의 고향마을처럼 푸근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아~ 만드레~ 만드레~ 나는 취해부렀으~ @#$%^$%&@^*%#@~”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린 계집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봤더니 동네 아주머니들을 모아놓고 어린 손녀의 재롱잔치가 한창이다. 어찌나 ‘만드레~ 만드레~’만 외쳐대는지 피식 웃음이 터진다. 노랫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이윽고 레퍼토리가 바뀐다.
“아싸~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있을 때 잘혀~ 흔들리지 말고~.”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노래를 부르면서 관광버스 춤을 추며 ‘무한 뺑글뺑글’이다. 허~ 저놈의 노래, 저렇게 콩만한 꼬마애가 부르니 어이가 없기는 한데, 나도 모르게 엄지를 쏙 빼고 주먹이 쥐어진다. 어깨가 들썩인다. 나도 돌고 있다. 은근히 중독이다.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연락이 닿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모항에서 하루를 묵기로 한다. 내일은 집에 있는다 했으니 아침이면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출렁이는 파도소리 사이로 아까 그 계집아이의 노랫소리가 또 들려온다. “아따, 고 가시내~ 목청도 좋다.”
농사꾼 박형진 시인을 만나다
아침에 드디어 그를 만난다. 노란 어린이집 봉고차를 타고 온 박형진 시인은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며 손수 민박집 마당의 평상을 걸레로 훔친다. 왠지 모르게 ‘꼬장꼬장한 사람이 아닐까?’ 했던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박형진 시인의 얼굴엔 온통 선한 웃음이 깃들여 있다.
“고향이 고향이지 뭐 글키 할 말이 있간디요?”
고향을 하루가 멀다 하고 근 오십여 년을 보고 살았으니 감회가 새로울 것은 없나보다. 그저 고향에서 농사짓고 글 쓰며 지내다 보니 고향도 많이 바뀌어 있더란다.
“변산이 경치는 우리나라 첫째로 좋다 안 허요? 그러다 봉께 사람들이 그걸 어디 가만히 내비둔다요? 여그 모항도 근래에 엄청 바뀌어 부렀으요. 그거이 좋고 나쁘고를 잴 것은 없다만서도 나는 그거이 적응을 못한 거제.
왠지 그의 말과 표정에서는 책에서 느꼈던 발랄하고 유쾌한 고향의 느낌보다 뭔가 안타까움이 더 진하다.
“고향에서 조용히 농사만 부쳐먹고 살 수 있으면 얼매나 좋겄어요. 나가 지금 논 한 필지에 밭을 아홉 마지기를 부쳐 먹는데, 늘 어려운께…. 우리나라에서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는 시대는 벌써 가부렀으요.”
1991년까지 농민운동을 하던 그는 ‘농사꾼은 농촌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이곳 모항에 다시 찾아들었다. 그리고 유치원 선생 아내를 만나 푸짐이, 꽃님이, 아루, 보리, 이렇게 네 아이들을 두었다.
먹고 자는 일이 사람 사는 전부라면 걱정이 있겠냐마는 전기세에 물세, 기름값 등 오르기만 하는 각종 공과금이며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년한 첫째와 둘째는 서울에서 자기들 앞가림하며 살고 있다 하더라도- 뒤치다꺼리는 공짜로 된다던가.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주위에 각종 경조사는 왜 그렇게 많아지는지….
그와 함께 사진 촬영을 위해 모항 등대로 나간다. 어제 혼자서 둘러봤던 그곳이 그와 함께 하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의 책에서 ‘줄줄이 구불텅구불텅 신새벽 좆 서듯이 울끈불끈 솟던’ 그의 감칠맛 나는 글로 묘사되던 그곳이 아니던가. 이곳만 하더라도 그 옛날엔 그가 동네 부랄 친구들과 함께 오징어를 잡으며 하루 반나절을 죽치며 놀던 놀이터였다. 하지만 여름철을 맞아 이곳은 벌써 외지 낚시꾼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내 고향, 누구더러 들어와서 놀지 말라는 건 아니오. 허지만 사람들이 왔다가 가기만 허면 온갖 쓰레기로 철갑을 해버링께…. 첨에는 쓰레기 한두 개 치우고, 그 담에는 더 많이 지우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화가 나부러요. 근데 그것도 오래되니까 면역이 돼요. 그게 면역이 되야불믄 안 되는 거인디….”
그의 고향 모항이 어떤 곳인가 이야기를 들으려 왔건만, 그의 입을 통해 책에서 느꼈던 ‘차지고 맛나는’ 느낌을 이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런 말을 굳이 듣지 않아도 박형진 시인의 얼굴이 그의 고향 모항의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대에 대를 이으며 코를 박고 산 주꾸미가 사람들에게 맛나기로 소문났듯이 흙이 좋아, 고향이 좋아 이곳에 뿌리를 박은 그의 얼굴도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겠는가.
“인제 서울 올라가는 거요? 잠깐 요 이야기 들을라고 나가 손님을 엄청 고생시켜붓네. 미안혀요.”
작은 구멍가게에서 사서 손에 들려준 ‘바밤바’가 금방 녹을 만큼 날씨도 더웠지만 그보다는 그의 마음이 더 따뜻하다. 그날도 모항은 ‘너벅너벅한 상추쌈 볼태기 터지는 여름’을 맞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금년 나이 여든다섯의 남백산 씨는
비루먹은 소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변산 들러 격포 채석강 찾아오는 관광객들
줄줄이 종암 고개 넘어오는데
팔구십 백 키로를 신나게 밟고 오는데
오늘은 남백산 씨 달구지에 걸렸습니다.
뒤에서 죽어라 빵빵대도…
이랴 쪄쪄 - 바쁘면 늬가 바쁘지
내가 바쁜가?
종암 고개 천천히 올라갑니다.
구십 고개 그렇게 올라갑니다.
성질 급한 차들
한 십 리 뻗쳐 있습니다.
-박형진 ‘남백산 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