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공주]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 갑사는 가을에 찾아야 제 맛이라는 말이다. 얼마나 좋기에 이런 말이 다 생겨났을까. 하지만 가을산과 사찰이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굳이 갑사구곡, 계룡팔경 등의 수식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을을 맞은 계룡산은 감성 충전을 하기에 제격이다. 눈으로, 가슴으로 성큼 다가온 가을을 만나러 가보자.
적막한 숲길 끝의 가을 산사
갑사보다는 ‘계룡갑사’라는 이름이 보다 친근한 이유는 서로가 존재함으로써 더욱 빛이 나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갑사의 화려한 단풍만을 이야기하지만 맑은 물소리를 따라가는 산행도 가을을 맞은 계룡산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공주의 또 다른 사찰인 마곡사는 대웅전까지 이르는 길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예전의 투박한 멋은 조금 퇴색이 되었지만 훌륭한 삼림욕장이 있어 위로받을 수 있고, 갑사는 뭐랄까, 영산이라는 계룡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그 품이 넉넉하게 느껴진다.
불자들뿐만 아니라 산깨나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반나절에서 하루 일정으로 부담 없이 찾기 좋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지로 일찍 개발되어 훼손은 되었지만 옛 모습을 상상해보면 꽤나 고즈넉한 절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에 이르면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달린 일주문이 탐방객을 맞는데 여기서부터가 진짜 ‘갑사 가는 길’이다. 숲은 대부분이 느티나무, 갈참나무, 고로쇠나무 등과 같은 활엽수로 추갑사(秋甲寺)라는 말을 만들어낸 주인공들이다.
평일이라 적막강산이었지만 그래도 피톤치드를 혼자서 독차지하는 호사를 누렸다. 갑사에서 동학사까지 겨우(?) 3시간 30분이라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용문폭포를 향해 걸었다.
계룡산의 다양한 탐방 코스
10월 중순부터 물들기 시작해 약 한 달 정도가 예쁜 단풍을 볼 수 있는 시기다. 많은 등산객들이 이때 계룡산을 찾지만 단풍의 경우 워낙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터라 어느 날 갑자기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져버릴 수도 있고, 또 보는 이를 애 태우듯 모습을 좀체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어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흔히들 낙엽을 인생무상에 비유하지만 낙엽이 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된다는 사실은 종종 잊는다. 그러니 멋들어진 단풍이나 낙엽을 보고 오지 못하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갑사를 기준으로 시작되는 계룡산국립공원엔 6개의 등산 코스가 있는데, 이 중 3개가 동학사로 내려오는 코스다. 모두 3~5시간 정도로 하루 일정으로는 충분해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용문폭포에서 금잔디고개 → 삼불봉 → 남매탑 → 동학사로 이어지는 탐방 코스는 3시간 30분 정도지만 금잔디고개에서 휴식 시간을 고려한다면 4시간~4시간 30분은 걸린다(그래도 해가 짧아지는 가을엔 점심때에 맞춰 산행을 끝내거나 늦어도 오후 3시~4시에는 마쳐야 한다).
일주문에서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갑사까지는 금방이다. 보행자 전용인 까닭에 조용히 걷기 좋고 또 탐방지원센터에서 책을 빌려주기도 하니 벤치에 앉아 마냥 여유를 부려도 좋겠다.
물소리 따라 호젓한 산행
갑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 때에는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였을 정도로 융성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오늘날에는 규모가 많이 줄었으나 여전히 갑사는 계룡산을 대표하는 명찰이다.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강당을 비롯해 동종이나 부도, 탱화 등 보물급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갑사를 지나치자마자 개량 한옥 한 채가 나타나는데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다. 이는 친일귀족 윤덕영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주인의 말을 빌리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풍수상 상당히 좋은 위치란다. 현재는 갑사 소유의 전통찻집으로 쓰이고 있는데 창문을 한껏 열어젖히면 계곡 물소리가 그대로 들어와 절로 깊은 숨이 들이마셔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니 산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차 한잔 마시는 여유는 가져볼 만하다.
찻집 왼편으로 난 완만한 숲길부터가 본격적인 계룡산 산행의 시작이다. 그래도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조금만 오르면 용문폭포에 이른다.
용문폭포에서 금잔디고개까지 가다보니 어느새 흙길이 끝나고 크고 작은 돌길이다. 초보 등산객이라면 살짝 겁을 먹을 만하고, 산행 좀 한다하는 사람들에게는 ‘까짓 1시간이면 충분한’ 길이다. 이 길을 꼭 걸어봐야 하는 이유는 갑사 입구에서 금잔디고개까지 약 3km가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길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갑사구곡이라는 이름도 이 길에서 생겨났다. 금잔디고개에 이르면 절반 이상은 온 셈. 오르막이 거의 끝이 나니 잠시 휴식을 한 뒤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동학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갑사에서 올라간 사람들도 거의 여기서 쉬었다 간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되는데 남매탑을 기준으로 동학사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다. 내려오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한두 마디 주고받을 때마다 힘이 생긴다(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조금만 가면 된다는 건, 얼마를 더 가야 된다는 뜻일까…).
멋모르고 시작한 산행에 대해 구시렁대다보면 어느새 계룡산의 또 다른 사찰인 동학사에 이르는데, 갑사만큼이나 정취가 뛰어나다.
자동차가 지나다녀 조금은 어수선한 감이 있지만 넓은 계곡은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다. 왜 동학사를 여름에 찾아야 하는지 알 것 같다.
동학사도 갑사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깊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한국전쟁으로 건물 전체가 전부 불타 없어졌다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구니 승가대학까지 갖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