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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사찰탐방] 하늘 아래 가장 가볍게 사는 절집 미타산 유학사
[사찰탐방] 하늘 아래 가장 가볍게 사는 절집 미타산 유학사
  • 김상미 객원기자
  • 승인 2007.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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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11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한적한 유학사 경내. 2007년 11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의령] 시간과 시간이 교차할 때 분명하게 구분 짓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겨울 추위가 먼저 온 듯하다. 라니냐 현상이라고 하지만 뚜렷한 계절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을 산사에 드리워진 호젓함에 젖어 어디에도 없는 나를 찾아볼 요량으로 의령 유학사로 향했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황금 들녘은 계절의 축복으로 여길 만큼 넉넉하다. 

산문을 나서는 산행인의

늦은 듯한 발걸음에
막연히 하늘 바라보니
흐르는 물인 듯이
쏟아지는 허허로움
누군가 찾아올 것 같은 바람
십이월의 추위를 느끼면서
엊그제 받아본
편지글이 떠오른다.

-주지 원담 스님의 <살구나무經> 중에서

2007년 11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울창한 미타산 속에 가려진 절집. 2007년 11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고속국도를 벗어나 합천, 의령 쪽 국도에 들어서자 논밭에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어떤 문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어린 시절 먹을 것이 귀해 울 안의 감나무는 식량이었어요. 감이 열리면 언제 홍시가 되려나 싶어 감나무 밑에서 목을 빼고 기다렸지요. 감이 익기 전에 감을 따 먹다 아버지한테 들키면 얻어맞기 일쑤였어요. 그런데 눈에 넣어 두었던 감이 홍시가 되어 떨어져 터질 때 아버지가 무척 원망스러웠지요.” 배가 고파도 따 먹지 못하는 감인데 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아까웠을까. 이 세상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인데 때를 놓쳐버린 아쉬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법인가 보다.

“마지막 잎새 같은 가을을 아직 느껴보지 못했습니까? 유학사에서 늦가을 편지를 받으세요.” 대웅전 앞, 두 팔을 벌리고 가을볕을 빨아들이고 있는 백일홍 한 쌍이 가을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종무소 옆 감나무도 잎을 다 떨구고 누군가에게 가을을 선물하고 싶은 모양이다. 유학사의 가을 영상편지다.

감잎보다 감이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 아침마다 나무 밑에 쌓이는 감잎만큼이나

가을은 깊어가고 잘 익은 홍시는 / 새들의 식사로 풍성한 날
은행나무들도 살짝이 물들어가는 햇살 뒤에/ 김장밭둑으로 가는 윤 노인의 손엔
속이 꽉 찬 배추 한 단 들려 있다 / 오늘 저녁엔 배춧국을 끓일 모양이다
조막만한 애호박 볶음에 / 구수한 배춧국으로 허리를 펴고
내일까지 말리면 다 되는 나락 수매해서 / 장날이면 국밥 한 그릇에 약주 한잔으로
여름날 더위를 잊을 것이다 / 다시 양파 모종을 하고
긴 겨울이 오면 성한 것은 자식들 주고 / 팔고 남은 홍시를 먹으며 내일날에
저 밭에 무엇을 심을까 / 산돼지에게  좋은 일 하지 않으려면,
이런 꿈같은 걱정 속에 단잠을 잔다 / 가을밤이 길다 윤 노인에게는

2007년 11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학이 저을 품은 채 머른다는 뜻의 유학사. 2007년 11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유학사는 1300년 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집이다. 극락전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 아미타삼존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본래는 오동나무로 만든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1980년대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불상을 본뜬 석고상이 있었다. 안타깝게 생각하던 원담 스님이 2002년 원래 모습의 본존불을 모셨다고 한다. 합천 해인사보다 오래된 절이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아 호젓한 적막이 흐른다. 적막을 읽으려면 나 역시 적막해야 한다. 유학사의 적막은 단청을 먹고 사는지 흐릿해졌다. 

원래 유학사는 미타산의 8부 능선 쯤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잠시 머물던 무학대사가 풍수지리에 맞지 않는다 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겼단다. 절집 부근의 형세가 날아가는 학의 형상을 닮았는데 절집이 학의 머리 부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학이 절을 품은 채 머무른다’하여 유학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웅전 뒤뜰로 올라보니 아담한 칠성각이 앉아 있다. 

적막으로 가득 찬 암자에서 유일하게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은 누각뿐이다. 출입문 밖 나무판에 사하촌 사람들이 칠성계를 조직하여 불사를 하였다고 적혀 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려니 해석이 난해한 고약한 법문 같다. 누하 기둥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내 속의 적막까지 빼앗아 달아나 집중력이 떨어진다. 앞산을 바라보니 산꼭대기 마을에 더 깊은 적막이 흐르는 듯하다. 절집보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심이 깊을까. 적막은 사람의 마음을 억누르기도 하지만 넉넉하게 세상을 품는 수양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2007년 11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호암 이병철의 생가가 잇는 장대마을의 고살길. 2007년 11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유학사는 평온함이 깊게 배어 있는 사찰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변하지 않는 무던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책 몇 권 들고 들어가 며칠 묵으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이 날 것 같기도 하다.  

극락전에 들어서기 전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어내라는 부처님 가르침 같기도 하다. 계단을 찬찬히 오르다 보니 짧은 순간에도 속세를 잊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가을 햇살이 절집 마당을 휙 돌아나가며 오층석탑 첨탑 위에 빛을 가득 내려놓고 간다. 멀리까지 광명의 빛을 비추라는 당부인지도 모른다. 

따뜻한 것이 그리운 세상살이에 외갓집 같은 절 하나 마음에 품고 사는 것도 행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데 스님이 가곡을 CD플레이어에 올려 부처님께 노래를 공양한다. 가을 산사에서 듣는 가곡은 극락정토에 머무르는 기쁨을 동반한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갈길이 바빠 마음속에 채워두었던 적막을 절집 마당에 부려놓고 조용히 산문 밖으로 나왔다. 개울물 소리가 도솔천을 건네주고 다시 꼭 오라며 악수를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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