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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여행] 불붙은 정조 신드롬의 메카 수원 화성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조선 최대 프로젝트
[역사여행] 불붙은 정조 신드롬의 메카 수원 화성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조선 최대 프로젝트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7.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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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성에서 보이는 수원 풍경.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수원] 정조가 부활하고 있다. 200여 년 전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조선의 임금은 드라마로 책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뒤주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에 가장 큰 개혁을 이루려던,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그의 흔적을 찾아 수원 화성을 찾았다.  

수원은 정조의 지극한 효심으로 탄생한 도시다. 수원엔 정조 13년에 지은 화성이 도시를 감싸고 있고, 화성 안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으로 갈 때 잠시 머물던 행궁이 자리하고 있다. 전국에 많은 행궁이 있지만 화성행궁은 규모면와 그 의미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사업은 수원부가 경기지역의 요충지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천 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화성행궁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백성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백성들의 고생을 덜어주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며….”
-수원시 간행물 <알기 쉬운 화성이야기(김준혁 저)> 중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성에서의 야간훈련모습을 그린 야조도와 임금의 가마인 어연.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수원화성 홍보관에 있는 정조와 채제공의 초상화.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성과 함께 행궁도 개혁을 추진하던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군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조선 최대의 이벤트’로 일컬어지는 8일간의 화성행차 기간 중에는 화성행궁에서 어머니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기도 했다. 

정조가 수원에 화성과 행궁을 지으면서 이렇게 왕권강화에 힘을 쏟은 이유는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임금이 된 그의 기구한 운명 때문이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당시 적대 세력이었던 노론에 의해 뒤주 속에서 굶어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렵고 달걀을 포개놓은 것처럼 위태롭다.”
-<존현각일기> 중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정조의 삶이 순탄했을 리 만무하다. 위의 <존현각일기>에서 보는 것처럼 ‘노론의 나라’에서 죽지 않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살았던 사도세자처럼 정조 또한 세손 시절부터 나약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찍소리 못하면서’ 살아야 했다. 

사도세자의 대를 이어 살기 위한 투쟁을 벌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 그래서 정조는 더욱 학문과 자기 수양에 힘썼고, 그런 아픔을 이겨내며 임금이 된 후에는 더욱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것이다.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적에게 들키지 않게 군수물자를 성 안으로 들여왓던 서암문의 바깥쪽.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성은 1997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성 건설은 노론세력의 저항과 민심을 아우르며 추진한 조선 최대의 프로젝트였습니다. 2년 6개월이라는 건설기간도 그렇지만 화성을 건설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었으며, 화성이 완성되고 나서는 수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수원시청 김준혁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정조는 수원에 화성과 행궁을 짓고 상업의 거점으로 발전을 도모해 노론세력의 바탕을 약화시켜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시켰다. ‘화성(華成)’에 담겨진 뜻이 ‘효를 통해 덕을 펼치는 도시가 되라’는 것이니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건설된 것은 물론이다.  

화성행궁 뒤편의 길을 따라 화성에 오른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평탄치 못했던 정조의 삶의 흔적 때문인지 화성의 첫 느낌은 애처롭다. 견고하게 쌓은 성은 그야말로 철옹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것은 마치 벽돌로 쌓은 듯 일정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하게 쌓은 축조기술이다. 1970년대에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져 곳곳에 시멘트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조선시대에 쌓은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사구시의 학문을 존중했던 정조답게 성을 쌓은 기술도 과학적이었다. 화성 건설의 일등공신은 당시 규장각 문신이었던 정약용과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이다. 정약용은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을 축성 지침서로 하여 거중기와 녹로 등의 새로운 기구를 고안해 커다란 돌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게 하였다. 이는 당시 건축기술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10년을 내다보고 시작한 공사가 2년 9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화성 한 바퀴를 다 돌고자 작정하고 왔으니 서둘러야 한다. 총 5.7km나 되는 거리라 제대로 보려면 약 4시간은 걸린다. 행궁 뒷길로 오르면 화성의 서포루를 가장 먼저 보게 된다. 여기서 장안문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성의 남쪽 문인 팔달문.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수원행궁 내에 화성을 지을 때 쓰이던 거중기가 전시되어 있다.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성에는 여러 가지 군사적인 시설이 들어서 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서암문을 만난다. 암문은 쉽게 말하면 ‘숨겨진 문’이다. 성 밑으로 뚫린 서암문은 밖에서 보면 쉽게 보이지 않아 적들 몰래 군수물자나 식량을 성 안으로 들여오는 데 쓰인다.

서암문을 지나면 서장대가 위용을 드러낸다. 서장대는 재작년 5월 방화로 타버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지난해 4월에 복구한 서장대다. 서장대는 1996년에도 불이 났었는데, 정조가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서장대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장대에서 정조가 훈련을 지휘한 군대는 정조의 호위군대인 ‘장용영’이다. 당시 군대는 권문세가가 거느린 가병(家兵)이었다. 군대가 사병화되면서 임금의 자리는 더욱 위태로워졌고, 이에 정조는 자신만의 군대로서 장용영을 키운 것이다. 규장각을 설치해 정약용, 이승훈, 김조순 등의 초계문신을 길러 자신의 신하로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정조가 어떻게 무인들을 훈련시켰단 말인가? 서장대 앞에서 김준혁 학예연구사가 한마디 거든다. 

“정조가 어릴 때 나약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정조는 활쏘기의 달인이었지요. 145m 거리의 표적에 50발을 쏘아 50발을 다 맞췄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진법에도 관심이 많아 <병학통>이라는 진법서를 편찬하기도 했을 만큼 무인의 자질도 뛰어났어요.”

늘 노론세력으로부터 살해의 협박을 받으며 살아왔으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리라.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견고한 화성에 지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수원화성홍보관에 전식되어 잇는 화성 축소 모형.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서장대 바로 앞에 서 있는 서노대 자리는 팔달산 정상의 가장 높은 부분이다. 성 안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서노대에 올라서니 수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덕분에 서노대 부근은 화성의 여러 곳 중에서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이다. 

화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기 설치된 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 등 4개의 문과 포루, 노대, 암문, 적대, 공심돈 등 군사 목적에 따른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다. 화성은 어느 곳 하나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 없다. 각 시설이 모두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요, 성의 바깥과 안의 모습도 다르다. 같은 곳이라도 보는 시점과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군사적 목적에 의해 건설된 곳이긴 하지만 진정 백성을 위하고자 했던 정조의 너그러움이 성 또한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 건 아닐까.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적들의 동향을 살피던 서노대.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팔달산 중턱에 있는 정조대왕 동상. 2007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깨끗한 달빛(정조)이 환하게 비추니… 비록 구름(신하)이 그 빛을 가리더라도 삽시간에 불과하다.”   
-<정조실록> 중

화성 위를 걸으며 ‘과연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이란 질문을 던져본다. 그의 개혁이 성공하여 ‘정조의 조선’이 이루어졌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어쩌면  허망하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오욕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임금 아래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그이기에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듯 정조가 10년을 더 살았더라면… 이란 질문의 답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화성의 아름다움에 취한다면 역사 속에서의 아쉬움은 잠시 뒤로 미뤄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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