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속초] 겨울에 더욱 빛나는 고장 강원도. 바다와 산, 투박하지만 정겨운 인심이 있어 더욱 가슴을 용두질 치게 만드는 볼거리와 즐길거리들이 너무 많다. 어디를 돌아야 할지 망설이는 당신을 위해 속초시청이 추천하는 황금 드라이브 코스.
속초의 설악해맞이공원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일명 ‘숲길 드라이브 코스’라고 불린다. 하지만 단풍이 무르익는 가을이 아닌 다음에야 숲길은 그리 감탄할 만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바다를 제외한 속초의 알짜 여행지만 골라놓아 당일 일정으로 드라이브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양양에서 속초로 넘어가는 쌍천교를 지나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것이 설악해맞이공원이다. 호미곶의 해맞이공원처럼 웅장한 맛은 없지만 공원 뒤로 펼쳐지는 겨울바다의 푸름은 인공적이지 않은 멋이 있다.
들고나는 오징어배를 형상화한 난간이 멋들어진 방파제로 걸어가면 더욱 바다와 가까워진다. 그 끝에서 자신이 마치 등대라도 된 양 좌우로 바다를 둘러본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속초의 대표 항구인 대포항의 분주한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낮에도 분주한 모습이지만 특히 해가 지고 나면 더욱 활기에 넘치는 대포항의 불야성은 해외여행객들 사이에서도 빠지지 않는 코스로 자리 잡았다. 혼자 여행온 탓에 회 한 접시 시켜먹기가 멋쩍지만 해가 지면 대포항을 혼자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공원 내에는 작은 조각공원도 있어 속초 출신의 조각가 박영근의 ‘바다에서’를 비롯해 김영원의 ‘탄생-99 뭍에 오르다’, 최명룡의 ‘달맞이’ 등 30여 점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잘 정비되어 있는 길은 주민들에겐 산책 장소로, 여행객들에겐 잠시 바다 냄새를 맡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해맞이공원 맞은편의 길이 설악동 입구다. 하지만 처음부터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분명 도심의 회색 건물을 가로수 삼아 달리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코스에서 가장 먼저 들러볼 곳은 상도문마을의 학무정(육모정)이다.
상도문마을은 옛 한옥으로 꾸며진 마을이다. 물론 한옥 지붕 재료도 요즘 것이고, 지붕 아래 본채는 양옥과 다를 것이 없는 집들이 많다. 하지만 예스러운 돌담과 함께 걷는 마을 골목길은 느낌이 따뜻하다.
마을의 거의 끝, 울창한 소나무 숲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육각 정자가 바로 학무정이다. 이곳은 속초팔경 중 하나인데, 정자 자체의 미학보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속초의 경치와 이곳까지 걸어오며 만난 마을길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상쾌한 향이 코끝에서 톡 터진다. 길을 재촉해야 하건만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다는 마음이 발을 무겁게 만든다. 아쉬운 마음에 올 때 걸었던 마을길과 다른 길로 걸어 나간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어차피 옛 골목길은 하나로 연결된 미로와 같으니….
상도문마을에서 나오면 목우재를 넘게 된다. 하지만 지금 그 고갯길을 넘어갈 수는 없다. 터널이 생긴 까닭이다. 목우재는 설악의 단풍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가을이면 그 어느 유원지 못지않게 사람과 차가 많아진다. 어쩔 수 없이 길을 정리해야 했을 것이다. 지난가을 나도 설악동 상춘객의 일부가 되어 단풍놀이를 즐겼으니 어두운 터널을 가며 이 안타까운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한다.
터널을 지나면 척산온천휴양촌에 다다르게 된다. 설악온천이라고 하면 더 쉽게 다가온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던 1960년대 개발되었다. 설악동 밑의 온천수를 끌어올려 형성된 척산온천에는 상처 입은 학이 이곳에 날아와 치료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곳에서 온천욕을 하고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도 있다. 전설은 꾸며내기 나름이지만 울산바위를 마주하고 즐기는 온천욕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다.
나야 어차피 겨울엔 따뜻한 물, 여름엔 차가운 물 정도만 아는 처지라 물에 함유된 성분은 애써 말하지 않겠다. 다만 안내책자에 따르면 색과 향이 없고 불소와 라듐 등 10여 종의 광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하니 그 효능과 가치는 ‘물 맛’을 아는 여행객들에게 맡긴다.
해맞이공원에서 일출을 보고 출발했으면 이 코스까지 오게 될 즈음 제법 출출한 시간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 여느 식당으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다행히도 이 드라이브 코스의 점심은 학사평 순두부촌에서 ‘제대로’ 먹을 수 있다.
“영동고속국도가 강릉까지 이어지기 전인 1960년대에는 운전하는 사람들이 미시령을 앞에 놓고 죄다 여기서 순부두를 먹었다고. 저 울산바위를 봐요. 고픈 배로는 절대 못 올라가요. 그때만 해도 마을에 차가 넘쳤지. 그런데 영동고속국도가 강릉까지 이어지고 나서는 영 재미를 못 봤어.”
학사평 순두부촌에서 30여 년간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김평길 씨는 초창기를 회상하며 마을의 유래를 설명해준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 주변에 콘도 공사가 한창일 때 이 마을 식당들이 ‘함바식당(공사 현장에서 밥을 대놓고 먹는 식당)’ 역할을 했지. 순두부 백반이란 메뉴가 그때 생긴 거요. 인기가 대단했지. 그래서 마을 자체를 아예 순두부 마을로 지정한 거죠.”
학사평 순두부는 강릉의 초당순두부와 마찬가지로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해 맛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맛은 거의 초당순두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순두부 백반 하나를 시켜놓으니 얼었던 몸이, 텅텅 비었던 위장이 들썩들썩한다. 순두부를 그릇째 들고 후루룩 마시니 입 안에 바다 냄새와 콩의 고소함이 환상의 하모니를 엮어낸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제대로 점수 딸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 ‘테디베어팜’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곰 인형인 테디베어를 전시해놓은 작은 전시관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어른 크기의 테디베어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어른보다 더 큰 테디베어에서부터 울산바위를 오르는 테디베어들, 스키를 타는 테디베어들까지 아이들이 전시장 안에서 거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아할 만한 곳이다. 무엇보다 코스의 목적지 중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곳이라는 점에서 빼놓지 말고 둘러보면 좋을 듯하다.
미시령휴게소 전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설악대명콘도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본격적인 숲길을 달리는 것이다. 단풍이 물들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길이지만 한적한 겨울에 달리는 숲길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곳곳에서 슬쩍슬쩍 내려다보이는 속초 시내와 동해바다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하지만 숲길은 짧다. 숲길 치고는 너무 잘 닦인 2차선 도로는 운치를 반감시킨다. 숲길이라고 해서 월정사 전나무 숲길 같은 걸 기대했다면 거의 실망할 분위기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알찬 목적지를 잇는 코스 덕분에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코스의 종착지는 영랑호다. 신라의 화랑인 ‘영랑’이 수련하던 곳으로 화랑의 정신이 한껏 깃든 이 거대한 호수는 청초호와 함께 속초에서 가장 큰 자연호수다. 호수 주변으로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줄을 잇는다.
차를 몰고 들어가는 길이 민망스러워 엄지발가락으로 최대한 살살 액셀러레이터를 밟지만,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에게도, 호수 위에서 낮잠을 즐기는 청둥오리들에게도 낯선 불청객은 환영 받을 수 없나보다. 여기저기서 보내는 눈총에 차를 구석에 세워놓고 걷기로 한다. 보기엔 호수지만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바다다. 영랑호변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범바위와 영랑정이다. 속초팔경 중 하나인 범바위는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다. 범바위의 등줄기에는 직접 올라가볼 수도 있는데, 작은 정자인 영랑정이 세워져 있어 영랑호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해가 저물 무렵이라면 이곳에서 석양을 지켜봐도 좋을 듯하다.
일출부터 석양까지, 속초를 한 바퀴 돌며 알차게 꾸민 숲길 드라이브 코스가 끝이 난다. 겨울 속초의 기온은 한껏 떨어져 있지만 영랑호 위로 떨어지는 낙조는 따뜻해 보이기만 한다. 한 무리의 청둥오리가 하늘 높이 날아주면 좋으련만 무심한 오리들은 아직도 저녁식사를 할 생각이 없는지 호수 위에서 둥실둥실 게으름을 피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