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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사찰기행] 경북 영천 중암암 돌구멍을 통하면 극락세계가 있느니 
[사찰기행] 경북 영천 중암암 돌구멍을 통하면 극락세계가 있느니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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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영천] 바다 위의 암자 휴휴암 바위 위의 암자 보리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이색적인 암자들이다  팔공산 은해사의 암자인 중암암도 바위 위의 암자다  하지만 중암암엔 특별한 것이 있다  돌구멍이 일주문이고 돌구멍에 해우소가 있다  욕심이 많으면 지나지 못하는 극락문도 있다  작지만 별천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역시 대구의 진산 팔공산 자락, 첩첩산중의 암자를 찾아가는 길은 녹록지 않다. 만약 차를 타고 간다면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면서부터 혼이 쏙 빠진다. 뱀의 똬리처럼 몸을 감고 있는 길은 대관령 옛길이나 한계령 옛길보다도 더 험하다. 

고작 차 한 대 지나갈 만한 폭에 허연 시멘트를 발라놓은 길이라 운전에 자신이 없다면 차를 두고 트레킹하는 셈치고 걸어가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더구나 오솔길에 촘촘히 서 있는 소나무들은 차 안에서 창문을 열고 빠끔히 얼굴을 내밀어 감상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바위에 뿌리를 내린 만년송.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바위틈 사이로 살짝 내려앉은 중암암.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정신없이 운전대를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어느새 암자 앞의 작은 주차장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때까지도 이곳에 있다던 중암암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정표를 따라 조금을 걸어가야 하는데, 딱히 길이 잘 닦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바위 위를 기다시피 걷는다. 

스님들의 공부방인 소운당을 지나면 이내 돌기둥 두 개가 서로 기대고 있는 돌구멍이 나타나고, 암자의 처마 끝이 살짝 보이며 이곳이 중암암임을 알게 된다. 이 돌구멍을 중암암의 일주문쯤으로 불러야 한다면, 아마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일주문이 될 것이다. 

한겨울의 암자에서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다. 겨우 한 사람 들락거릴 돌구멍을 지나 겨우 한 사람 지나다닐 수 있을법한 마당길을 걷지만, 그 좁은 길에서조차 누구 하나 마주치지 않는다. 가슴 높이의 담에서 바라보는 팔공산 자락의 모습은 겨울이지만 눈이 쌓이지 않아 황량하다. 

정면에서 아래로 시선을 내리꽂는 순간, 기겁을 하며 물러선다. 천 길 낭떠러지 벼랑이 아래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앙증맞은 암자는 그렇게 가파르고 높은 벼랑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줌이 되지 않는 카메라 렌즈를 탓하며 담벼락에 한 발을 걸쳐놓고 몸을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라 다리를 수습한다. 아~, 황천 갈 뻔 했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된장독 뚜껑으로 덮어놓은 이 작은 우물은 눈과 마음을 밝게 해준다는 명안수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해우소.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중암암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는 다름 아닌 해우소(화장실)다. 근심 걱정을 해소한다는 해우소는 여느 사찰에나 다 있다. 하지만 중암암의 해우소는 특별하다. 돌구멍 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해우소 또한 벼랑 위의 바위구멍 속에 있다. 아마도 커다란 바위에 두 개의 구멍을 파낸 모양이다. 현재는 문을 걸어놓아 그 역사적 공간 안에서 거사(?)를 치르는 호사는 누릴 수 없다. 단지 바위 속에 있는 해우소라 해서 유명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우소의 깊이다. 이것을 빗대는 옛 일화가 있다. 

옛날에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중암암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 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통도사의 스님이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한 말 세 되나 떨어진다”며 은근히 절의 규모를 법당 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셨다. 이어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 때는 배를 띄워야만 저을 수 있다”고 하며 절의 규모와 큰 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중암암 스님은 절의 규모로는 자랑할 게 없자,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자랑을 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이야 “뻥 치시네!” 하며 웃어넘길 일이지만, 허풍으로 통도사와 해인사를 제압해버린 중암암의 해우소가 얼마나 깊은지 상상해볼 일이다. 

해우소의 위치상 ‘볼일의 결과물’이 어떻게 떨어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옆에서 살펴봐도, 아래에서 올려다봐도 알 수가 없다. 고로 그 깊이 또한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다만 이제까지 올라온 만큼의 높이를 ‘똥’이 자유 낙하한다 치면 누가 뭐래도 엄지손가락 척 내밀며 ‘우리나라 최고!’라는 말을 아끼지 않으리라.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고려시대 초기의 삼층석탑.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극락록을 지나면 어린이가 밀어도 흔들린다는 건들바위가 있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중암암 돌구멍의 백미는 ‘극락굴’이다. 법당 위쪽에 있는 삼층석탑 옆으로 들어서는 극락굴은 그야말로 사후세계를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입구로 2∼3m쯤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굴이라기보다는 틈이라고 해야 할 작은 공간이 나온다. 이 틈새로 들어서 몇 걸음 가다보면 좌측으로 꺾어지는 틈새가 나오고, 그 틈새를 따라 다시 꺾어지면 처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
□자 형태의 굴(틈새)을 지나게 되는 것인데, 그 비좁은 틈새는 비만의 기준에서 에누리가 없다. 그 틈을 빠져나가려니 이건 고문에 가깝다. 혼자 버둥거리며 뱃살을 접어 우선 통과시키고 몸뚱이를 밀어 넣는다.  

겨우 몸이 빠져나온다. 단지 좁은 바위 틈새를 빠져나온 것뿐인데 환생한 기분이 드는 건 뭐지? 극락의 문을 넘은 기쁨. 이곳을 ‘극락전’이라 부른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매한가지 기분이 들어서였나보다. 욕심을 부려 양껏 짐이 든 가방이나 두꺼운 옷을 입고 지난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공수레공수거’, 생이 끝날 때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함을 몸으로 느낀다. 

감춰놓았던 암자를 바위 위에 고이 숨겨놓은 중암암.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곳에는 그 어느 곳보다 아기자기한 불심이 깃들여 있다.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하늘과 맞닿은 작은 암자의 극락굴에서 한 번쯤 자기가 살아온 세월을 평가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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