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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주제가 있는 여행] 경주 최부자의 흔적을 찾아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주제가 있는 여행] 경주 최부자의 흔적을 찾아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서태경 기자
  • 승인 2008.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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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쌀 800석을보관할 수 있었던 창고.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여행스케치=경주] 경주 최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니지만 부자 되기 열풍이 식을 줄 모르는 요즘, 한 가문이 300년간 부를 지속해온 이야기는 되새겨봄직하다. 10대에 걸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며 진짜 부자란 무엇인지 일러준 이들이다.

30여 년 만에 복원된 큰 사랑채
갑작스러운 폭우로 늦더위가 한층 수그러든 지난 9월 초 경주 교동에 있는 최부잣집을 찾았다. 한식당 요석궁을 지나 자그마한 공터에 이르니 ‘독립유공자 최준 선생 생가’라고 씌어진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인기척이 없어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니 사랑채에서 기다리던 최용부 선생이 반갑게 맞아준다. 현재 교동 최부잣집의 관리와 해설을 맡고 있는 분으로, 2006년 사랑채가 복원되면서 문화해설 관련 일을 해오던 차에 아예 고택 관리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마루에 앉아 최부자 가계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와 함께 집 안 곳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최부잣집 안채의 모습.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큰대문채를 들어서자마자 정면에는 주인이 기거했던 큰 사랑채, 왼편에는 아들들이 기거했던 작은 사랑채가 자리했다는데, 1970년 말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어 2006년 복원될 때까지 공터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손들의 고증 덕에 제대로 복원이 된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단다. 큰 사랑채만 복원이 되고 작은 사랑채 자리는 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지만 지금도 하루 평균 100명 정도의 방문객이 찾아올 정도로 경주 최부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꾸준하다. 지난여름 KBS <한국사 傳>에 최부자 이야기가 방영된 후로 더욱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단다. 

사랑채를 지나 부인과 며느리, 딸들의 거처였다는 안채로 들어가 보니 항아리단을 중심으로 ㄷ자 모양의, 크지 않은 규모의 집이다. 안채는 일제시대에 약간의 변화만 있었을 뿐 200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용부 선생에 따르면 “지금으로 치면 경주의 영빈관이 바로 최부잣집이었지요. 변변한 여관이나 호텔이 없었던 시절에 부잣집에선 정부나 외국에서 오는 손님도 맞이해야 했던 거지요.” 

일제시대 역대 통감, 미국 초대 대사는 물론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도 신혼여행 중에 최부잣집에 들러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고고학자였던 구스타프 황태자는 경주에 들른 차에 최부잣집에 머물게 되는데 아녀자들의 공간인 안채를 볼 수 없었던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고 후에 한국으로 파견된 여간호장교를 시켜 최부잣집의 안채 사진을 찍어 오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이조리에 있는 종가.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부자로서의 건강한 모델
경주 최부자의 시작은 최진립(1568~1636)과 그의 삼남 최동량(1598~1664)이다. 최진립과 최동량 역시 부자이긴 했지만 만석까지는 아니었다. 어느 대에서부터 만석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최씨 선대의 행장에서 보면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의 9대조인 최국선 때부터 부가 정착되었다는 게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의 저자인 전진문 교수의 설명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최부자의 명맥이 장남으로만 이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최부잣집을 종가로 오해하고 있는데 실제론 최진립 이후 셋째, 맏이, 둘째로 이어지면서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한 부모에서 나왔는데도 부를 누리는 자손은 따로 있으니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경주 최부자가 300년간 부를 축적하고 세상의 인심을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겸손과 베풂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진 가훈 여섯 가지를 비롯해 가정에서의 도리를 다룬 가거십훈(家居十訓), 상황에 따른 대처 방법을 다룬 육연(六然) 등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이중 ‘사방 백 리 이내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와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등의 가훈은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덕목들임에도 불구하고 잘 지켜왔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물질만능주의 세상을 사는 요즘 사람들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마당에 있는 방아의 흔적.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크고 깊다.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참다운 선비 이야기
당시 부자들의 집은 아흔아홉 칸이 보통이었고 만석꾼 최부자의 집이라면 당연히 엄청난 규모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작은 편이다. 이는 내남면 이조리에서 지금의 교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유림과의 조화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점점 재산이 불어나면서 관리와 과객 접대에 한계를 느꼈던 최부자 최기영은 지관을 통해 전국의 명당을 알아보게 했고 최종적으로 경주 교동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유림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바로 옆 향교의 용마루보다 다섯 자 낮게 지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 붙었고 이에 유림들은 설마 다섯 자나 낮추어 집을 지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최기영은 땅을 세 자 파고, 기둥은 두 자를 낮춰 향교보다 집을 낮추어 89칸 집을 지었다. 

현재의 교동법주 고택은 최기영이 이조리의 본가에서 일부를 가져와 먼저 짓고 한동안 머물던 곳이다. 그후 1970년 12월에 사랑채 두 채가 불타는 등 풍파를 거치면서 7000평 규모의 후원도 사라지고 현재는 50여 칸으로 줄어들었다. 

교동 최씨 고택 주변은 경주 최씨 집성촌으로 바로 옆에는 경주 법주가, 그 옆에는 최준의 동생이자 독립투사 최완 선생의 후손이 살고 있다. 또 내남면 이조리에서도 종가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고 최부잣집의 기초를 다진 최진립의 흔적은 그의 위패를 모신 용산서원과 이조리 종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독립투사 최완의 생가가 근처에 있다. 2008년 9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의 손자 최염은 30대에 고향을 떠나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용부 선생은 최부자가 만석꾼이었다는 사실만 부각되는 점이 아쉽다고 말한다. 실제 최준은 백산상회라는 회사를 통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공급하는 데 앞장섰고, 그의 동생은 독립 운동을 하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경주 최부자 500년의 신화>를 쓴 최해진 교수는 ‘최부자 이야기는 온 가족 구성원(노비 포함)이 사람 사는 도리를 잘 지킨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다. 또한 참다운 선비 이야기다’라며 부자가 존경받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한다. 

이제는 반갑게 맞아주는 하인도, 후한 대접도 없지만 300년을 이웃과 함께한 최부자들의 사랑에 앉아 이 시대의 진짜 부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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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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