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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한걸음 천천히, 쉼표 여행] 국내 최초 트레일 지리산 길 생각하며 추억하며 천천히 에둘러 걷는 둘레길
[한걸음 천천히, 쉼표 여행] 국내 최초 트레일 지리산 길 생각하며 추억하며 천천히 에둘러 걷는 둘레길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10.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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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황금빛으로 물든 논.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남원] 지리산 하면 으레 등산을 하거나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될 것 같다. 지리산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그리고 한가로이 걸을 수 있는 장거리 도보 트레일(Trail) 코스가 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걸어봤다. 

트레킹은 많이 알아도 ‘트레일(Trail)’이라는 말은 생소하다. 쉽게 말해서 트레킹은 ‘걷는 행위’를 말하고 트레일은 ‘걷는 길’을 말한다. 이미 외국에선 보편화된 개념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었다. 

이 트레일 코스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니, 바로 지리산을 한 바퀴 도는 ‘지리산 길’이다. 이 길은 지리산을 정복하고자 하는 등산로가 아니다. 자동차로 빠르게 내달리는 드라이브 길도 아니다. 한발 물러서서 지리산에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의 마을과 숲, 다랑논을 지나며 천천히 걷는 길이다. 따라서 그 목적지도 지리산 정상이 아니라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지리산에 지천인 고사리.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지리산 길 곳곳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11년까지 구례·남원·하동·산청·함양 등 5개 시·군의 숲길과 강변길, 논둑길, 마을길을 연결해 300km의 장대한 지리산 길이 만들어질 것이지만, 우선은 20여km의 길만 걸을 수 있다. 이는 해가 지나면서 조금씩 더 길어질 터, 이 또한 천천히 기다리는 미덕을 발휘하라는 뜻인가 보다. 

제1구간이 시작되는 남원 매동마을에 선다. 한눈에 마을 전체가 모두 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역사적인 지리산 길의 첫 발걸음이 시작된다. 마치 뒷동산에 ‘마실’가듯 산길로 오른다. 아직은 마을에 소속된 시멘트 길, 그 주위로는 산사람들이 일구어놓은 밭에 채소며 고사리가 지천이다. 

혹시나 여행객들이 이것들에 손을 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어김없이 ‘길을 걷다 마주치는 농작물은 눈으로만 봐주세요’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자신들의 터전으로 길을 만들라 허락해준 마을 사람들의 고마운 마음을 몰라주고 농작물에 손을 대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가보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마을의 길에서 만난 다람쥐.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등구재 길.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올해 밭농사는 잘되었구먼” 주제넘게 남의 집 농사를 이래저래 평가하며 조금 걸으니 이윽고 숲길이 시작된다. 맞은편에서 넘어오는 여행객이 반갑게 인사를 먼저 건넨다. 생전 처음 마주치는 얼굴이지만 지리산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은 매한가지인지라 누구를 만나도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든다. 

“좋은 숲길 되세요.”
그렇게 화답을 하고 다시 길을 걸으려 하니 상대편에서 한 마디 다시 건넨다. 
“천천히 걸으소. 빨리 걸으믄 존 거 다 놓침데이.”

그렇다. 이 길은 되도록 천천히 걷는 길이다. 하지만 항상 목적지를 정해놓고 속도전을 치르던 습관이 몸에 배어버려 아직은 천천히 걷는 것이 영 어색하기만 하다. 

정작 숲길에 들어서면 지리산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곳이 지리산인 것을…, 나는 지금 지리산의 능선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게 우거진 숲길은 그야말로 한적한 길이다. 

숲은 몇 백 살은 먹음직한 고목과 이제 막 가지를 펼치기 시작한 어린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사람의 흔적을 되도록 많이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곳이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잡초들을 뽑아낸 길과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만이 유일한 사람의 흔적이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불에 그을린 것처럼 까만 바위들이 강처럼 늘어섰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산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다랑논.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숲에서 만나는 오래된 돌담 또한 옛 사람들이 논을 만들기 위해 쌓은 것이지만 세월이 지나 사람이 떠난 지금은 야생동물들이 거니는 삶터가 되었다. 사람은 자연에 큰 빚을 지고 있어 땅이나 물 따위의 모든 것들을 자연에서 잠시 빌려온 것이나,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망각하고 자연을 마구 파헤치고 정복하려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통나무를 잘라 만든 벤치에서 찐 달걀도 까먹고, 여기저기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숲길을 벗어난다. 상황마을의 시멘트 길을 조금 걸으니 드디어 새색시의 노란 치마폭처럼 곱게 펼쳐진 다랑이 논길이 펼쳐진다. 

그 치마폭에 조심스럽게 오르면 저 멀리로 지리산 능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남의 논길을 마음대로 걸어다니는 것이 얼마나 실례가 되는 일인지 아는 나는 혹시라도 벼 알곡이라도 건드릴까봐 조심조심 걷는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몇 백 년은 됨직한 고목나무 아래 작은 쉼터를 만들었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가파른 골짜기에 돌 축대를 층층이 쌓아 만든 다랑논은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았던 농민의 애환이 담긴 독특한 산골경관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이 다랑논도 기계가 잘 돌아다니도록 평평하게 개간되거나 아예 버려진 곳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다랑논의 아름다운 풍경도 직접 땅을 일구며 사는 농민들의 시름은 덜어주지 못했던 모양이다. 

다랑논 정상에 서면 산바람에 가을 향이 한껏 실려 온다. 만약 지리산 정상을 향해 악을 쓰며 올랐다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향기다. 그 고운 바람엔 잠자리도 실리고 갈대도 실린다. 농부의 땀도 실리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실린다. 한참 동안을 다랑논 정상에 서서 그렇게 가을의 향기를 맡는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금계마을에서 바라본 칠선계곡과 천왕봉.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다랑논을 지나면 야생화가 한들거리는 숲길이 나온다. 이 길은 등구재 길이다. 거북의 등을 닮아서 ‘등구재’라 부르는 이 고개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던 고갯길로 옛날 경상도 마천 사람들이 전라도 인월로 장을 보러 가던 길이자 시집장가를 가던 길이었다. 

비록 이 등구재는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오도재라는 곳은 변강쇠와 옹녀가 개성 청석관에서 눈이 맞아 삼남을 떠돌다 경남 마천 등구마을로 올 때 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고개다. 전북에서는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던 곳이 남원 산내면 대정마을이라고 주장하는 바, 그렇게 따지면 변강쇠와 옹녀도 이 등구재를 넘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생활용품을 나누고 문화를 잇던 이 고개는 조금 더 천천히 걸어봄직하다. 때론 소를 팔러 가는 농부가 되어보기도 하고, 약초를 팔러 가는 약초꾼도 되어본다. 그렇게 등구재를 걷고 있자니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치며 이 고개를 오르내렸을 옛 조상들의 희로애락이 느껴진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구간 사이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등구재를 지나 500년 묵은 당산나무가 있는 창원마을을 지나면 제1구간의 끝인 금계마을이다.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지리산 길이 만들어지고 칠선계곡이 근처에 있는지라 세련된 펜션도 간혹 눈에 띈다. 

정면으로 칠선계곡과 천왕봉이 지척이다. 마음 같아선 저 천왕봉까지 냉큼 오르고 싶다. 하지만 이제껏 걸어온 길은 ‘천천히 에둘러 걷는 지리산 길’이 아니던가. 나머지 제2구간은 금계-세동마을의 10여km 길로, 중간에 있는 벽송사가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해 ‘산사람 길(옛날 마천 사람들은 빨치산을 ‘산사람’이라 불렀다)’로 불린다. 이름만큼 1구간보다는 조금 더 힘들다. 제2구간을 완주하려는 이라면 금계마을에서 하루 머물다 가면 좋겠다. 

오늘 하루 걸은 길은 앞으로 이어질 800리 지리산 길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20여km, 하지만 마음으로 걸은 길은 거기에 몇 백 km를 더 얹어도 될 듯하다. 걷는 속도처럼 천천히 이어질 지리산 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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