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고택여행] 경북 의성 산운마을 구름도 쉬었다 가는, 금성산이 품은 양반골
[고택여행] 경북 의성 산운마을 구름도 쉬었다 가는, 금성산이 품은 양반골
  • 최혜진 기자
  • 승인 2008.11.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산운마을 전경.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여행스케치=의성] 의성의 산운마을은 400년 전 과거를 그대로 담아낸 한 폭의 그림처럼 고풍스럽다. 고색창연한 고택은 고즈넉함 속에 또 한 해의 깊은 가을을 맞고 있다. 

알고 보니 의성은 한때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성읍국가였단다. 이름조차 생소한 조문국이라는 나라가 의성군 금성면을 도읍으로 하고 번성하다가, 서기 185년 신라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고 전해진다.

조문국의 옛 도읍지였던 금성면에서 춘산 가음 쪽으로 가다보면 금성산 아래 둥지를 튼 산운전통마을을 만날 수 있다. 산운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처럼 많이 알려진 것도, 관광지로서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붐비지 않기에 조용하고 고즈넉한 매력이 있다. 전통마을의 풍취를 더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가옥과 가옥을 잇는 고샅길의 소박한 운치.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산운마을로 들어서면 마치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경계선을 넘는 듯하다. 마을 안은 400년 전 과거를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병풍처럼 두르고 40여 채의 고택이 그 안에 오밀조밀 모여 있다. ‘산운(山雲)’이라는 이름은 ‘금성산 수정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을 보고 붙여졌는데, 실로 금성산의 넉넉한 품에 안긴 마을의 분위기는 구름도 쉬어 갈 듯 조용하다. 

금성산에는 묘자리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금성산에 묘를 쓰면 크게 부자가 되는 대신, 마을에는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가뭄이 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금성산에 묘자리를 절대로 쓰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마을을 둘러보다가 영천 이씨 감사공파 26대손인 이은영 씨를 만났다. 그로부터 “조선 선조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 이광준이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일궜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그 후 이곳은 영천 이씨의 집성촌으로 400년 넘게 그 맥을 이어왔다. 영천 이씨의 영화는 회화나무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소우당 별당채로 들어가는 길.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운곡당의 문간채.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흙길 곳곳에, 낮은 토담 사이에 우뚝우뚝 서 있는 회화나무는 마을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면 하나씩 심었던 것이란다. 광해군 때 승지를 지낸 경정 이민성, 현종 때 형조판서 운곡 이희발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따스한 흙길을 따라 선비들이 남긴 흔적을 헤아려본다. 

산운마을에는 학록정사(지방유형문화재 242호), 운곡당(경북문화재자료 374호), 점우당(경북문화재자료 375호), 소우당(지방중요민속자료 237호)등 전통가옥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이 있다. 주민들이 문화재 안에서 아직도 생활을 하고 있다. 가을볕에 말릴 곡식이 대청마루에 널려 있는 것처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어 고택이 더 빛난다. 

마을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는 운곡당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운곡당은 다른 가옥보다는 규모가 큰 편으로 안채, 사랑채가 한 동으로 연결되어 있는 날개집 유형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안채를 막고 있는 나지막한 담이다. 지금으로 치면 손님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목적으로 세워놓은 것이란다. 1m 남짓한 작은 담 속에서 선비들의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소우당 별당채에는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연못이 있다.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운곡당에는 손님 보호의 목적으로 작은 담이 세워져 있다. 2008년 11월. 사진 / 최혜진 기자

소우당은 별당채가 볼거리다. 안채와 사랑채에서 연결되는 곳에 원림을 조성해놓았다. 원림 중앙부에 별당이 있고 그 아래로 연못과 수림이 있는 정원으로 꾸몄다. 별당채 연못은 우리나라 지도 모양인데, 의도적으로 그리 한 것인지 만들고 보니 맞아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시집가지 않은 딸을 위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만 전해내려올 뿐이다. “별당채는 당시 영천 이씨의 권력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는 것이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그만큼 인력을 부릴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로, 19세기 상류 가옥의 풍취를 잘 보여준다. 

별당채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소우당 안채에서 기척이 난다. ‘안에 누가 있나’ 안을 살피다 이내 그만두기로 마음을 모았다. 귀중히 보존된 고택처럼 문화재 속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미덕일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작은 배려가 훗날 더 가치 있는 문화재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우당 밖을 나와 고샅길을 걷는다. 

산운마을의 가옥은 사람들의 온기가 배어 있기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 쌓여온 세월의 때가 고택과 황토담, 그리고 흙길에도 완연하다. 조용히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청명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세월아 네월아’ 걸음도 느긋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