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대전] 한동안 추위를 핑계 삼아 운동을 멀리한 탓인지 몸이 둔해진 느낌이다. 하지만 입춘도 지나고 코끝으로 봄기운이 감지되자 마음은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올봄에는 걷기에 충실하자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여행과 운동을 동시에!
몇 년 전부터 불고 있는 걷기열풍. 초반에는 신체건강에만 초점이 맞춰졌지만,지금은 걷기가 신체는 물론 뇌건강 등에 끼치는 영향 등 미세한 부분까지 관심이 미치고 있다. 그리고 걷기 효과를 배가시키는 장소 선택에 대한 안목도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연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는 대로보다는 푹신한 흙과 나무가 있는 숲이 좋을 것이고, 장비를 갖추어야 하는 등산보다는 걸을 수 있는 길이 더욱 부담 없기 때문이다. 걷기 하나 하는데 뭐 그리 까다롭게 구냐는 사람도 있지만 좋은 환경, 제대로 된 곳에서 시작을 해야 재미가 있는 법이다. 바로 수많은 걷기 코스를 제쳐두고 계족산에 자리한 장동삼림욕장을 찾은 이유다. 걷기운동 하나만을 위해 대전까지 간다면 뭐하지만 중부권에서 꽤 유명한 곳인데다 여행까지 겸한다는 생각을 하면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장동삼림욕장은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많이 알려진 곳이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황톳길’의 역할이 컸다. 2007년 이곳 삼림욕장의 일부 구간을 한 주류회사에서 황톳길로 단장하면서 널리 소문이 난 것이다. 13km 코스에 15t 트럭 100대 분의 황토를 깔고 누구나 그 길을 밟을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계족산은 인기 산행 코스로 떠올랐고 ‘숲속에서 맨발걷기 카페’도 생겼다.
황토의 약성, 온몸으로 느끼다
장동삼림욕장 입구를 지나자마자 아늑한 숲길이 펼쳐진다. 아직 곳곳에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지만 웃음꽃이 핀 사람들의 얼굴엔 이미 봄이 와 있는 듯하다.
아이들은 이곳이 맨발걷기 코스라는 소리를 듣고 장난 삼아 양말을 벗어던지고 까치발로 걸어다니는 등 장난을 치느라 정신이 없다. 이내 발이 시려 양말을 신지만 운동이라면 질색하는 요즘 아이들에게도 뭔가 달라 보이긴 하나보다. 나 역시 오랜만에 등산화를 신으니 괜히 기분이 좋다. 조금만 따뜻했다면 맨발로 걸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 맨발로 도전했다가는 병원으로 직행해야 할 것 같아 참기로 했다.
황토는 겨우내 눈과 비에 유실되어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렇게 걷기 좋도록 정비된 흙길을 만나는 것도 흔치 않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한다. 그래도 황토와 숲이 만난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큰 듯하다. 요 며칠 쓸데없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고 덩달아 어깨까지 무거웠는데 어느 순간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게 정말 황토 덕분이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걸은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삼림욕은 봄과 여름에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황톳길 걷기에서는 굳이 계절을 따질 필요가 뭐 있으랴. 인근 추동에서 왔다는 한 할아버지는 “황토가 어디에 어떻게 좋은지는 잘 모르지만 예전에 황토로 집을 짓고 살고 그랬던 걸 보면 몸에 좋긴 좋은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길이 잘 되어 있어 노인이나 아이들이 걷기에도 힘이 안 들고 또 숲이 우거질 때 찾으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며 일주일에 두세 차례는 계족산을 찾는다고 한다.
굳이 황토의 효능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황토가 지닌 약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이제 황토 하면 건강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우리 생활과 가까워졌다. 목욕탕에선 너도나도 온몸에 황토팩을 바르고 앉아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황토를 이용해 집 안을 꾸미는 등 웰빙 트렌드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황토가 이토록 사랑받은 이유는 다름 아닌 황토에서 방출되는 원적외선과 탁월한 해독 능력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좋은 황토 한 숟가락에는 약 2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을 정도로 약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황토를 직접 발로 밟고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까지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호사스러운 건강법이 있을까 싶다.
반나절 걷기 코스로 ‘합격점’
계족산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은 주로 연화사 코스를 선호하지만 한나절 부담 없는 나들이를 원한다면 이곳 삼림욕장에서 시작해 계족산성까지 왕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특별히 등산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되고 길도 잘 정비되어 있는데다 숲도 꽤 우거져 걷는 기분이 제법 난다. 입구 안내판을 보니 계족산성까지 2.6km로 약 1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 쉬는 시간까지 포함해 계족산성까지는 약 1시간 30분, 하산하는 데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산성 정상에서의 휴식시간을 감안하더라도 3시간 정도면 넉넉하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길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면 산성에 오를 때는 평상 옆 계단을, 내려올 때는 임도를 이용해 에둘러 내려와도 된다.
1시간 30분 만에 오른 계족산성은 경치가 제법이다. 산성을 알리는 표시가 허술해 그냥 흔적만 남은 산성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복원이 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풍광도 그만이다. 이 산성은 수도 방어를 위해 백제가 쌓았다고 보는 견해와 축조 방식을 볼 때 신라가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어찌 되었건 그 위치로 보면 요새였음이 분명하다. 많은 산행객들이 이곳 성벽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자니 솔솔 졸음이 쏟아진다.
올라오는 길에는 아직 겨울의 한기가 남아 있었는데 산성에 앉아 있으니 몸 안으로 봄기운이 스미는 듯하다. 주차장에 애물단지를 세워놓고 와 오늘은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야 하지만, 조만간 볕이 따뜻해지면 황톳길을 제대로 걸어볼 참이다. 그때는 당연히 맨발일 것이다. 그나저나 소리소문 없이 몰래 왔다 가는 봄을 놓치지 말아야 할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