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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자전거 타고 한강 여행] 살아 숨쉬는 역사 박물관, 청계천 조선의 꿈, 근대화 의지 모두 품었네
[자전거 타고 한강 여행] 살아 숨쉬는 역사 박물관, 청계천 조선의 꿈, 근대화 의지 모두 품었네
  • 김대홍 기자
  • 승인 2009.03.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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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청계천에 흐르는 물.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조선의 개국과 함께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자 청계천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도성의 중심부와 나란히 하며 가로지르는 하천인데다 범람 등의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조선 초 따로 관청까지 두었을 정도다. 이후 오늘날까지 이곳은 여전히 커다란 역사의 흐름과 함께하는 현장이 되고 있다.   

청계천을 잘 알지 못하던 시절, 이미 청계천을 부르고 청계천을 상상했다. 천지인이 부른 노래 ‘청계천 8가’ 덕분이었다. 1993년 데뷔한 천지인은 ‘열사가 전사에게’ ‘청소부 김씨 그를 만날 때’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그중 ‘청계천 8가’는 서정성 깊은 곡과 가사로 마음을 적셨다.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 물 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찬 /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 어느 맹인부부 가수의 노래도 / 희미한 백열등빛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 술렁이던 한낮의 흔적도 / 어느새 텅 빈 거리로 / 칠흑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 끈질긴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1990년대 초반 당시 이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1990년대 후반 서울에 올라오면서 청계천에 가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청계천 7가에서 9가까지 늘어선 노점상 거리에 자주 갔다. 사람들은 그곳을 황학동 벼룩시장 또는 도깨비시장이라 불렀다. 3~4시간은 족히 걸어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노점 앞에서 입이 떡 벌어졌었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2003년 옛 황학동 벼룩시장의 모습. 당시 이곳에 가면 구하지 못할 것이 없다 했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가격도 얼마나 싼지, 비디오테이프 10개를 1000원에 팔고 옷도 1000원이었다. 얇은 지갑 들고 나가 하루 종일 구경하다 물건을 잔뜩 사서 집에 오면 뿌듯했다. TV, VTR, 세탁기, 냉장고 등을 모두 그곳에서 샀다. 물론 옛날 일이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주변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청계천은 노점상 거리보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심하천으로 기억된다.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
우리가 익숙하게 부르고 있는 청계천(淸溪川)은 사실 옛날부터 불리던 이름은 아니다. 조선시대 내내 불리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다. 새로운 나라를 연(開國) 조선의 입장에서 개천은 매우 중요했다.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인데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범람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조선 3대 왕 태종은 개천을 관리할 관청인 개거도감(뒤에 개천도감으로 이름 바뀜)을 설치한 뒤 대규모 개천공사를 시작했다. 5만2800여 명이나 동원된, 당시로선 큰 공사였다. 공사 도중 죽은 인부만 64명이나 됐다. 성종 때는 개천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수해에 대비했고, 영조 때는 20만 명을 동원해 57일간 개천 바닥을 깊이 파내는 공사를 했다. 이때 수로를 직선화하고 양쪽에 석축을 쌓았다. 이와 같은 공사는 1908년까지 2~3년에 한 번씩 꾸준히 이어졌다. 이후 100년 사이에 복개와 복원을 거치며 큰 변신을 거쳤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두물다리 옆 청계9가 청계천문화관. 옛 추억의 한 자락.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자전거를 타고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어가면 청와대와 경복궁이다. 고개 정상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여기가 청계천 발원지다. 도로변에 발원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북악산 정상 부근 북동쪽 약 150m 지점 약수터가 발원지지만 차도 옆에 발원지 표지석을 세웠다.

고개 내리막길을 지나고 경복궁을 지난 뒤 청계광장 입구에 섰다. 복원된 청계천이 시작되는 곳이다. 터를 넓게 닦아 청계광장으로 꾸몄다.

가장 먼저 모전교가 보인다. 조선시대 중심 하천이었던 청계천엔 수많은 다리가 놓였다. 광통교, 광교, 장통교, 삼일교, 수표교, 관수교, 세운교, 배오개다리 등이 복원된 다리에 놓였다. 다리 이름에서 조선 500년 역사와 숨 가빴던 대한민국 근대사가 엿보인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도심하천으로 거듭난 청계천.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광통교는 주변에 시전이 있어 도성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닌 번화가였다. 수표교는 홍수에 대비해 물높이를 재는 ‘수표’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삼일교와 세운교는 청계천이 복개된 뒤 만들어진 삼일고가도로와 한때 대한민국 최대 전자상가였던 세운상가를 떠올리게 한다. 2차선 차도엔 사람과 자전거만 있고 자동차는 없다. 주말과 공휴일엔 ‘차 없는 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2005년 11월부터 청계광장에서 청계2가 삼일교까지 약 900m 구간은 자동차 출입금지구역이 됐다.

자동차 매연과 소음에서 벗어난 길을 달린다. 날씨가 추워 사람도 별로 없다. 길 양쪽으로 수많은 동네들이 스쳐 지나간다. 서린동, 무교동, 관철동, 삼각동, 장교동, 수표동, 관수동, 입정동, 장사동, 산림동, 주교동, 예지동. 서울에 얼마나 많은 동네가 있었는지 청계천은 기억한다. 아무리 길이 헐리고 새 집이 지어져도 동네 역사를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새 청계4가다. 잠시 1960년으로 돌아가보자. 이승만 독재가 극에 다다른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들이 크게 시위를 벌이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리던 임화수, 유지광이 습격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알려져 다음날 4·19라고 불리는 대규모 시민항쟁이 벌어졌다. 서울 중심가와 나란히 달리던 청계천은 곳곳이 역사 현장이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중요한 역사의 현장 청계천. 지금은 높은 마천루 속에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버들다리 부근은 전태일 거리다. 주변은 동대문상가. 청계천 평화시장 쪽에서 일하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거리엔 전태일 동상 건립을 기념하며 새긴 각종 동판이 바닥에 붙어 있다.  

황학동 부근을 지나자 노점들이 넘치던 몇 년 전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 노점 900여 곳이 동대문운동장으로 들어갔다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면서 다시 신설동 옛 숭인여중으로 옮겼다. 서울시는 프랑스 생투앙벼룩시장, 영국 포토벨로마켓, 태국 짜뚜짝 주말시장 등과 같이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란다.

역사는 과거를 품고 흐른다
자전거는 계속 달린다. 무학교 부근에 옛 청계고가도로 시절 교각이 세 개 보인다. 그 시절 역사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놓은 것이다. 청계고가도로는 1971년 8월 15일 만들어졌다. 

전체 길이가 5650m였다. 서울 최초 고가도로가 1968년 만들어진 아현고가도로이니, 한창 고가도로가 만들어질 시기의 도로다. 이때까지도 청계천은 한창 복개 중이었다. 1958년에 본격 복개 공사에 들어간 뒤 완전히 공사가 마무리된 것은 1977년 12월 31일이었다. 청계천이 완전히 어둠 속에 갇힌 지 20여년이 지나자 복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옛 청계고가도로 교각 흔적을 보면서 변덕스런 역사를 생각했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공휴일엔 다니기가 더 좋다. 차 없는 보행자 세상이다. 2009년 3월. 사진 / 김대홍 기자

다시 페달을 밟았다. 갑자기 나타난 판잣집이 자전거를 멈추게 만든다. 두물다리 옆 청계9가 청계천문화관 옆엔 판잣집 네 채가 만들어져 있었다. 옛 영화 포스터 <저 하늘에도 슬픔이> <마부> <마음 약해서> <해병특공대> <빨간 마후라>, 옛날 방, 막걸리 병과 잔이 있는 소반, 교복, 흑백사진. 안에 들어서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한쪽에선 난로가 추위에 잔뜩 움츠린 방문객을 맞이한다. 

정신없이 구경하노라니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진다. 중국인 여행객들이다. 언제부터 청계천이 외국관광객들까지 찾는 명소가 된 모양이다. 여기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청계천으로 들어섰다. 이전까지는 청계천 옆길에 자전거가 들어갈 수 없다. 보행전용이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옆에서 느끼며 자전거를 달렸다. 

눈높이보다 높이 자란 갈대가 눈을 즐겁게 만든다. 자전거에서 내렸다. 걸으며 여유를 즐겼다. 내(川)가 많이 넓어졌다. 10km 넘게 달려온 청계천이 이제 여행을 끝내야 할 시점이다. 청계천은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들어간다. 길이는 짧지만, 청계천은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 근대사를 고스란히 품은 큰 내다. 청계천을 가면 응당 그 역사까지 둘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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