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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⑦] 지금도 볼 수 있는 그날의 흔적 경교장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⑦] 지금도 볼 수 있는 그날의 흔적 경교장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3.05.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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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근현대사를 통틀어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는다면, 많은 이가 백범 김구를 맨 앞자리에 놓을 것이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머문 곳이 바로 경교장이다. 그는 여기서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온 힘을 쏟다가,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2층 집무실에는 지금도 총알 자국이 선명한 유리창이 남아 있다. 

내가 경교장을 처음 본 것은 강북삼성병원이 고려병원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경교장이 의사 휴게실로 쓰이던 때였다. 선생님 문병을 온 고등학생의 눈에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는 건물은 그저 낡고 오래된 곳이었을 뿐, 어떤 비극적 역사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13년 4월, 경교장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병원 구내에 뜬금없이 자리하고 있어 급한 일로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경교장은 원래 ‘죽첨장’이라는 이름의 별장이었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백범의 집무실이 있는 2층 창문에서 총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경교장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금광으로 큰돈을 번 최창학의 별장이었다. 이름도 경교장이 아니라 죽첨장이었다. 그걸 해방 이후 중국에서 귀국 준비를 하던 김구에게 내어놓았다. 최창학은 일인계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였고 일제 말기에 거액의 군자금을 바쳐 친일파로 비난받은 인물로, 그가 제공한 경교장이 김구의 숙소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그러니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는 상하이가 아니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그러던 1949년 6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던 김구가 이곳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다.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눈물을 쏟았다. 주인을 잃은 경교장은 이후 중국대사관과 월남대사관으로, 병원이 들어선 후에는 의사 휴게실로 쓰이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흉탄에 간 주인의 운명만큼이나 험한 세월을 돌아서 제 모습을 찾은 셈이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백범이 세상을 뜨고  빈소가 경교장에 차려졌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독립 영웅의 빛과 그림자
알다시피 김구의 일생은 그대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다. 10대 후반에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고, 만주에서 의병 활동을 했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는 그 보복으로 일본인을 죽이고 옥고를 치른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광복군을 창립하는 등 그야말로 조국 해방의 한길로 불철주야 매진한 인생이었다. 

여기까지는 각종 위인전과 교과서를 통해 익히 알려진 내용.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우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보복으로 죽인 일본인이, 사실은 그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일본 민간인이었다는 논란이 있다. 뭐, 이거야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해의 여지가 있는 일이고(더구나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번엔 “김구는 테러리스트다”라는 주장으로 넘어가보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테러리스트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계획적으로 폭력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가 한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한 상황이었다. 이런 속에서 단순히 일제에 대항하는 폭력(테러)을 문제 삼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백범이 손님을 맞았던 경교장 1층 응접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다만 그 칼끝이 일제뿐 아니라 정치적 반대파에게까지 향했다는 점을 아우른다면 이야기는 매우 복잡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립의 암살이다(<백범일지> 참고). 그리고 이런 행동은 해방 이후까지 이어져서 북한의 김일성에서 우파 독립운동가인 송진우까지 좌우를 가리지 않은 여러 테러 사건의 배후 인물로 김구가 강력한 의심을 받았다. 특히 이승만의 오랜 후원자였던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김구는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신복룡 <한국분단사 연구> 참고). 


이렇게 촉발된 이승만과의 정치적 갈등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사실 장덕수 암살 사건 하루 전 김구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사실상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1947년 12월 1일). 하지만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의 관계가 급랭하면서 단독정부 반대를 확실히 하고 평양까지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남북협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북한의 김일성 또한 자신의 집권 없는 남북통일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남북한 모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김구의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줄어든 상황에서 암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암살 당시 백범이 입은 피 묻은 옷.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창문의 총알 자국, 피 묻은 옷
강북삼성병원 안, 누구도 이런 장소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경교장에 들어서면 제법 널찍한 응접실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곳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등의 회의와 국내외 주요 인사의 접견이 이루어졌다. 맞은편 귀빈식당은 백범이 서거했을 때 빈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현재 귀빈식당 벽에 걸려 있는 빛바랜 흑백사진에는 백범의 영정과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2층엔 백범의 집무실이 있었다. 그는 평상시 주로 여기서 일했고, 그날 이곳 창가에 앉아 있다가 안두희에게 총을 맞았다. 총탄은 모두 네 발이었다. 첫 발은 코 아래를 뚫고 오른쪽 볼을 빠져 유리창을 뚫고 나가고, 두 번째는 목을 정면으로 뚫고 역시 유리창에 맞고, 세 번째 탄환은 오른쪽 폐를 뚫고 복도에 박혔다. 이때 백범이 일어섰다. 그러자 마지막 총알이 왼쪽 하복부를 관통했다. 백범은 즉사했고, 안두희는 현장에서 잡혔다. 그때 두 발의 총탄이 관통한 유리창을 지금도 볼 수 있다.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백범이 친필로 서명한 태극기와 <백범일지> 초간본.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6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지하 전시실에는 그때 백범이 입은 피 묻은 옷이 전시되어 있다. 죽은 직후의 모습을 담은 데드마스크, 당시 상황을 담은 <라이프>지와 함께. 그 옆에는 그 유명한 ‘나의 소원’이 담겨 있는 <백범일지> 초간본과 윤봉길과 훙커우 공원 거사 직전 바꿨다는 시계, 백범이 서명한 태극기 등이 보인다. 그날 윤봉길과 시계를 바꾸고 헤어지면서 백범은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했단다. 그래서일까? 1946년 윤봉길의 유해가 효창공원에 안장되고 3년 후, 백범 또한 효창공원에 묻혔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하나.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는 사건 발생 1년 만에 군대로 복귀해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평생을 숨어 살다 1996년 백범의 원수를 갚으려는 시민의 손에 죽었다. 이로써 백범 암살의 배후는 역사 속에 묻혀버렸으나, 가장 유력한 배후로 의심받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1965년 망명지 하와이에서 눈을 감은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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