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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⑤] 잃어버린 궁궐, 잃어버린 역사 경희궁 금천교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⑤] 잃어버린 궁궐, 잃어버린 역사 경희궁 금천교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3.02.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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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서울역사박물관 건물 앞으로 개울도 시내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있는 오래된 돌다리가 하나 있다. 이런 게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놀랍게도 이 다리는 원래 수백 년째 그 자리에 있었다. 거기서 그렇게 한 왕의 몰락과 500년 왕조의 몰락, 새로운 나라의 탄생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만약 여러분이 40대에 가깝거나 그 이상이고, 서울 강북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면 ‘경희궁청소년도서관’이란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거기서 책과 함께 평소 보기 힘든 이성을 힐끔거렸을지 모르겠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자리는 이전에 경희궁청소년도서관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있었으며, 더 오래전에는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 ‘서궐’이라 불리는 경희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사악한 기운을 막는 금천교 서수.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현재 금천교 모습.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지금도 경희궁이라 불리는 건물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수백 칸에 이르렀던 경희궁 전각 중에 복원된 것은 달랑 네 곳. 그나마 정문인 흥화문을 제외한 건물 셋은 최근에 완전히 새로 지은 것들이다. 사실 흥화문도 집 나가 여러 곳을 떠돌다 원래 있던 위치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경희궁의 건축물 중에서 광해군 10년(1618)에 처음 지어진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생뚱맞게 놓여 있는 경희궁 금천교이다.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경희궁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흥화문.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기구한 팔자(?)의 흥화문

원래 금천교란 궁궐의 정문 뒤에서 임금이 사는 신성한 장소를 속계와 구분해주는 역할을 하던 다리다. 당연히 조선의 궁궐에는 어디나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 아래로는 자그마한 시내가 흐르고 옆으로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돌로 만든 ‘서수’를 배치한다. 그렇다면 다리를 따라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은? 그걸 막으려고 금천교 난간에 또 다른 서수들을 새겨 넣은 것이다. 경희궁의 금천교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면, 그 정문인 흥화문은 당연 금천교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흥화문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된 사연에는 경희궁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서울의 다른 궁궐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강점기의 경희궁도 이리 찢기고 저리 팔리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그래도 궁궐의 꼴은 유지한 다른 곳들과는 달리, 경희궁은 아예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일제는 이곳에 있던 100여 동의 건물을 몽땅 부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고는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지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었지만 경성중학교가 서울고등학교로 문패만 바뀌었을 뿐, 아무도 지난 왕조의 궁궐을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경희궁청소년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거의 모든 이들이 왜 ‘경희궁’이란 이름이 들어갔는지 모르는, 심지어 경희궁이 과연 궁궐인지 아닌지도 헷갈리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원래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묶어 ‘동궐’, 경희궁과 덕수궁을 묶어 ‘서궐’이라 부르는 ‘5궐 체제’였다).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새로 지은 건물이다.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경희궁 뒤쪽에 있는 서암.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흥화문은 한때 나라님이 사시는 궁궐의 정문으로 그 위엄을 뽐냈으나, 그 나라가 남의 손으로 넘어간 뒤에는 남의 나라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밀려 길가로 나앉고, 그것도 모자라 나라를 빼앗은 원수(이토 히로부미)의 사당 정문이 되었다가, 어영부영 그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의 대문이 되어 오가는 손님맞이에 바빴다. 그리고 집 떠난 지 수십 년 만에 우여곡절을 겪고 돌아왔으나, 이때는 이미 자기 터에 큰 빌딩이 들어선 후라 결국 애먼 곳에 자리를 잡았다. 허, 참, 만약 사람이라면 책 한 권 분량은 너끈히 나올 기구한 인생임에 틀림없다.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영조 어진. 광해군이 지은 경희궁을 가장 오래 애용한 이는 영조다. 2013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피하지 못한 광해군의 운명
그런데 흥화문과 경희궁의 기구한 인생은 그걸 만든 광해군의 운명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버린 상태에서 우선 복원이 결정된 곳은 창덕궁과 창경궁이었다. 그런데 이 두 궁궐은 ‘따로 또 같이’ 하나의 궁궐(동궐)을 이루니까 유사시 왕이 갈 만한 예비 궁궐이 필요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인경궁을 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전란의 피폐함이 아직 회복되지 못했던 시절, 아마 다른 왕이었다면 거기서 멈추고 더 이상 궁궐을 짓는 무리는 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그때, 풍수지리에 통달했다는 술사들이 “새문동에 왕기가 있으니 역모를 막기 위해서는 이곳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보고를 올리자 안 그래도 늘 자리에 불안을 느끼던 광해군은 결국 그 의견을 좇아 새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게 바로 경희궁이다(그런데 당시 그 집에 살던 정원군의 아들이 훗날 왕권을 잡은 인조였으니, 그 술사의 말이 결국 맞았던 셈이다). 

광해군은 서자였다. 그것도 둘째 아들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버지 선조는 정실의 자식이 없었고, 이복형 임해군은 일찌감치 아버지 눈 밖에 나 있어 세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새어머니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적자니까 ‘대군’이다)을 낳자 다시 왕위 계승이 불안해졌다. 결국 이 불안감이 광해군을 폐위로 몰아가는 빌미가 되는 동시에 경희궁이 세워지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당연히 신하들의 반대가 빗발쳤으나 광해군은 밀어붙였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다른 궁궐과 달리 단층인 것도 신하들의 반대를 무마시키기 위해 광해군이 양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워낙 명분이 약한 일이라 완공에는 7년의 시간이 걸렸고, 결국 완공하는 해에 벌어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경희궁에 입궐도 해보지 못한 채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다른 궁궐들이 어느 정도 옛날의 영화를 되찾아가고 있는 데 비해 경희궁만이 정문조차 제자리를 찾고 있지 못한 것은 어쩌면 광해군에서 비롯된 운명의 굴레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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