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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④] 식민지 근대 의학의 빛과 그림자 대한의원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④] 식민지 근대 의학의 빛과 그림자 대한의원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3.0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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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대학로 서울대학교병원에 들렀다가 혹 보신 분이 있으신지? 본관 바로 뒤편에 고풍스러운 르네상스 스타일의 붉은 벽돌 건물이 서 있는 것을. 옛날 서울역과 비슷한 시계탑을 머리에 이고서 말이다.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병원 제중원의 뒤를 이어 설립된, 당시로선 동양 최고의 시설과 수준을 자랑하던 대한의원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나라 문을 연 후 밀려들어온 근대의 파도에는 빛과 그림자가 섞여 있었다. ‘외국 군대’로 대표되는 제국주의의 발톱이 그림자라면, 종두법으로 상징되는 근대 의학은 조선 인민들에게 빛이 되었다. 어떻게든 잘 대접해 그저 목숨만 부지하길 빌었던 ‘마마님’을 주사 한 방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대명천지 개명이다. 그 중심에는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이 있었고,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899년 한반도에 최초로 문을 연 의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된다. 그 의학교의 흔적이 지금도 대학로 서울대학교병원 안에 남아 있다. 병원 본관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의원이 바로 그것이다. 


1907년 완공된 대한의원은 지금도 그 시절 그 모습이 고스란하다. 돔 양식의 둥근 지붕을 얹은 네오바로크풍의 시계탑, 르네상스 양식의 벽면,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는 현관 포치 등. 그리고 정문 오른편에는 조선 종두법의 대명사이자 의학교 초대 교장인 지석영의 동상이 있다.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붉은 벽돌과 돔 양식 지붕이 인상적인 시계탑.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마마야, 물럿거라, 지석영 대감 행차시다
한반도 최초의 근대 국립 병원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H. Allen)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운 제중원이다. 그 뒤로 고종의 대한제국이 시작되면서 의학교와 새로운 근대 국립 병원(광제원)을 설립했는데, 1905년 을사조약으로 들어선 일제 통감부가 이를 통합해 당시로선 동양 최고의 규모와 수준을 갖춘 대한의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대한’이란 이름 대신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고, 1928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 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근대 의학과 병원은 조선 인민에게 빛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빛은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미치지 못했다. 근대 병원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먹고살기도 힘든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로서는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 건물의 병원에 출입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런 병원은 죽을병이나 걸려서야 갈 수 있는 -사실은 그마저도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곳이었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땡볕>에 등장하는 주인공 덕순처럼, 죽을병에 걸린 아내를 지게에 들쳐 업고 대학 병원에 가서도 비싼 병원비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또 하나, 일제강점기에 의학교를 졸업한 의사들 대부분이 칼을 차고 진료를 보는 군의관으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지금까지도 일부 남아 있는 의사들의 권위주의가 싹트기도 했다. 
우두 접종도 고가였다. 거기다 일부 종두 의사들은 횡포를 일삼았다. 


사실 종두법은 지석영이 일본으로부터 한반도에 ‘최초로’ 들여온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정약용의 <마과회통>에도 우두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헌종 때는 종두법의 하나인 인두법(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딱지를 이용한 치료법)이 널리 시행되기도 했다. 조선 정부 또한 우두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이 조선 정부의 노력을 폄하하고 종두법의 일본 수입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석영 신화’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1922년 일본인들이 세운 실험동물공양탑.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실험동물을 위해 세운 90년 전 위령비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 의학의 선구자인 지석영의 동상은 대한의원 입구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의원 건물은 2층을 의학박물관으로 꾸며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1층은 여전히 서울대학교병원 사무실로 이용되어 병원 관계자들이 출입하는 탓에 들어가기가 조금 망설여지지만, 로비의 안내판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우리 근대 의학의 풍경을 만나볼 수 있다. 

첫 상설 전시실에는 근대 의학 도입과 관련된 유물들이 보인다. 광무 11년에 대한의원 교관 명의로 발급된 빛바랜 졸업증서가 눈길을 끈다. 광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처음 사용한 연호다. 그리고 광무 11년을 마지막으로 고종은 물러나고 다음 해부터는 500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융희 연간이 시작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이 중앙에 자리 잡은 대한의원 기념 책자, 한글보다 한자가 훨씬 더 많은 의학교 화학 교과서, 식민지 시기에 사용되었던 산부인과 의료 기기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1940~1960년대 사용했던 의료 기기.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광무 11년(1907년) 대한의원 초기의 졸업증서.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전시실은 한국전쟁 이후의 의료 현장으로 이어진다. 1950년대까지 일상에서 널리 쓰이던 고약과 유리병에 담긴 살충제, 1년에 두 번의 기생충 검사와 결핵 예방을 독려하는 포스터들이 퍼즐처럼 옛날 기억들을 다시금 불러낸다. 

조금은 뜬금없지만 쇠뿔과 경주 남석으로 만든 조선 후기의 안경들도 볼만하다. 유리보다 온도 변화가 적어 여름엔 눈이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 최고의 안경으로 평가받았단다. 마지막 전시실에는 서울대학교병원의 출범과 발전에 대한 내용들이 있다. 하지만 멋진 외관에 비해서는 전체적으로 전시물들이 빈약하고 좀 두서없이 진열된 듯 보이는 점이 아쉽다.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전시실 내부 풍경. 우리나라 근대 의학의 흐름을 엿볼 수 있으나, 자료가 빈약한 것이 다소 아쉽다. 2013년 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층 전시실을 모두 보고, 들어갔던 정문이 아니라 후문으로 나오면 오른편 구석에서 자그마한 돌 비석을 하나 볼 수 있다. 조금 흘려 쓴 한자로 ‘실험동물공양탑(實驗動物供養塔)’이라고 적혀 있다. 대한의원이 조선총독부의원이었던 1922년, 의학 실험용으로 쓰인 동물들을 위한 위령탑이다. 동물뿐 아니라 사람도 실험용으로 삼았던 엄혹한 시절에 이런 탑이 세워졌다니 조금은 의외란 생각이 든다. 

실험동물공양탑을 보고, 다시 한 번 건물 앞으로 가서 르네상스풍의 위풍당당한 건물의 위용을 감상한다. 

근대 의학의 빛이 동물실험이란 그림자와 함께하듯, 식민지 조선의 근대 의학에는 대다수 인민들의 삶과는 유리된 암울했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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