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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오지 트레킹] 옛 탄광의 사연 따라 하늘로 오르는 정선 화절령 하늘길
[오지 트레킹] 옛 탄광의 사연 따라 하늘로 오르는 정선 화절령 하늘길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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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화절령 하늘길.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 = 정선] 강원도 정선에는 하늘에 성큼 다가서는 길이 있다. 이름하야 ‘화절령 하늘길’이 바로 그곳이다. 겨울이면 뽀얀 눈이 살포시 내려앉아 하얀 카펫을 만들어주는 이 길은 ‘레드 카펫’처럼 선택된 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하늘길 걷다가 진짜 이승 뜨는 것 아니야?”
고도가 1,000~1,300m나 된다니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하늘길이라고 하니 이번 참에 아예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이다. ‘하늘’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장엄하고 거대하게 느껴져 이름을 듣자마자 주눅이 든다. 흡사 ‘백두산’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걱정을 덜려면 우선 하늘길에 대해 좀 알 필요가 있다. 1950년대부터 이곳 사북과 고한 일대는 탄광이 성업하던 곳이었다. 지금의 하이원 스키장이 들어선 곳 또한 과거엔 석탄광이 있던 자리이다. 탄맥을 찾아 여기저기 갱도가 들어섰고 그 갱을 연결하기 위해 산 구석구석 길이 연결되었다. 이것이 바로 운탄도로이다. 하지만 2001년 정선의 마지막 석탄광이 있던 이곳이 폐쇄되자 길도 잊혔다. 수 년의 시간이 흘러 그 수십 갈래의 운탄도로 중 한 곳이 ‘화절령 하늘길’로 다시 태어났다. 하늘길 앞에 불리는 화절령(花折嶺)은 ‘꽃을 꺾는 고개’라는 뜻으로 정선과 영월을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폭포주차장 맞은편에서부터 하늘길이 시작된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카지노와 스키장이 들어선 사북의 변화야 둘째 치고서라도, 시커먼 탄을 트럭 가득 싣고 다니던 백운산과 함백산의 산업도로가 이제는 가족이 웃으며 걸을 수 있는 트레킹 길로 변신을 했으니 사북의 ‘상전벽해’와 마찬가지로 운탄도로의 ‘환골탈태’란 말이 과언이 아닐 터이다.

강원랜드 호텔에 이르기 전 폭포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길을 건너면 이정표와 함께 하늘길이 시작된다. 하얗게 눈이 쌓인 길을 오르기 위해 온몸을 꽁꽁 싸맸다. ‘온 가족이 함께 걷는’ 산책길이지만 발목까지 눈이 쌓인 덕에 등산화에 아이젠까지 칭칭 감았다. 

하늘길에서는 오로지 나무와 길만이 사람을 이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눈이 온 후 벌써 두어 명의 사람이 먼저 길을 올랐는지 깨끗한 눈 위에 발자국이 두 갈래로 나 있다. 초행길에 혼자는 아니라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시멘트 길에 오르니 처음부터 제법 가파른 경사가 이어져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뽀얀 입김이 허공으로 뿜어진다. 

눈이 쌓여 바닥이 보이지 않는 길은 구불구불 이어진다. 허연 김을 쏟아내던 입을 한껏 벌려 숨을 들이쉬니 하늘과 가까운 맑은 공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트레킹 시작점이 이미 해발 1,000m에 육박하니 보통 공기가 아니다.  

4km를 조금 지나자 길이 좁아진다. 먼저 올랐던 이들의 발자국은 인근 산장으로 이어져 이제부터는 내가 순결한 눈길에 첫 발자국을 새기며 걷는 판국이 되었다. 평탄한 길이 조금 이어지나 싶더니 이내 몸을 곧추세울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경사가 다시 시작된다. 

동행하는 이 하나 없는 길엔 반사거울이 친구를 대신한다. 사진 / 손수원 기자

발자국 밑으로 드러난 본래 길의 색이 온통 까만색이다. 아스팔트는 아닌 듯 자세히 살펴보니 폐탄이다. 오른쪽으로 바라보니 오래전부터 인적이 끊긴 듯한 시멘트 건물이 보인다. 시커먼 입구가 으스스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건물은 사북에 있던 동원탄광의 광업소이다. 탄광이 폐쇄되고 사람들은 떠났어도 성황을 이루었던 그때의 흔적은 미처 다 지우지 못한 모양이다. 그 당시엔 이 동네의 개들도 입에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을까? 그만큼 사람도 많고 돈도 넘쳐났었겠지….

가파른 석탄 언덕을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로 접어든다. 그전에 이정표를 보고 숲길로 들어가면 살포시 감춰진 도롱이 연못을 볼 수 있다. 폭이 80여m나 되는 이 연못은 갱도가 무너지며 생긴 늪이다. 땅 밑이 꺼지니 자연스레 구덩이가 생기고 지하수가 고였다. 뿌리가 뽑힌 고목들은 죽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거나 구덩이에 몸을 뉘었다. 눈이 쌓여 연못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눈에 뒤덮인 경치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옛 탄광의 광업소 자리는 이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을씨년스러울 뿐이다. 사진 / 손수원 기자

도롱이 연못에는 애틋한 사연이 있는데, 화절령의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의 아내들이 이 연못에서 남편의 무사고를 빌었다고 한다. 연못에서 살던 도롱뇽을 보면서 남편 또한 무사할 것이라 믿었다. 행여나 도롱뇽이 보이지 않으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나 노심초사하며 하루를 지냈을 터이다. 그런 절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으니 이 연못은 경치만 살펴보는 것으로 끝낼 수가 없다.

도롱이 연못을 지나면서 하늘길은 더욱 높아지고 깊어진다. 해발 1,300m에 이르는 길 주위로는 낙엽송과 침엽수가 우뚝 서 있다. 여기서부터는 옛날 트럭이 다녔던 길답게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바람에 눈이 쓸려간 바닥은 온통 검은색이다. 길 중간중간 탄을 쏟아 부은 모습과 길을 내기 위해 나무를 잘라 모아둔 모습이 아직 남아 있다. 오른쪽으로는 백운산 자락의 능선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나뭇가지에 얹혔던 눈들이 바람에 실려 흩날리면서 설국(雪國)의 절경을 만들어낸다. 

백운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능선. 사시사철 시원한 풍경을 보여준다. 사진 / 손수원 기자

화절령 삼거리를 지나면서부터 하늘길은 각자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산죽길을 지나면 박새꽃 길이 이어지고, 그 후로는 낙엽송 길과 얼레지 꽃길이 여정을 인도한다. 이름들을 보건대, 하늘길은 들꽃이 만발하는 봄이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사계절 걷기 좋은 길이지만 말이다. 

지금은 눈으로 뒤덮인 만큼 세상이 단순하다. 눈 내린 하늘길에선 눈만이 아니라 오감을 다 열어둘 일이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귀로 듣고, 나무가 내뿜는 청량한 공기를 코로 맡는다. 곳곳에 남겨진 옛 탄광의 흔적들에서는 마음으로 그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헤아려 본다. 이렇게 한 발걸음에 오감을 동원하며 걷다보면 이내 눈은 렌즈가 되고 머리는 셔터가 되어 하늘길의 풍경이 마음에 담긴다.

갱내 폐공에서 용출되는 지하수를 정화하기 위한 시설. 사진 / 손수원 기자

8km 지점을 지나면 백운산 전망대가 나온다. 작은 나무 전망대에서 산자락을 내려다보면 백운마을과 저 멀리 영월의 상동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제는 하늘길도 2km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숲길을 내려오면 골프장이 나오고 이로서 하늘에 잠시 가까워졌던 여정도 끝이 난다. 

세 시간 남짓 하얀 눈길을 따라 하늘로 오르는 여정을 마치니 길을 다 봤다는 생각보다는 ‘계절이 바뀌면 꼭 한 번 다시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겨우내 눈에 묻혔던 그 땅 위에 어떤 꽃이 피어날지, 눈꽃을 피웠던 그 고목들은 또 어떤 신록을 피워낼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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