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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시가 있는 마을] 옛 시인의 이야기가 지줄대는 얼룩백이 황소의 고향 충북 옥천 구읍 향수마을
[시가 있는 마을] 옛 시인의 이야기가 지줄대는 얼룩백이 황소의 고향 충북 옥천 구읍 향수마을
  • 손수원 기자
  • 승인 2010.0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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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눈 밭에 소들.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 = 옥천]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이 있다. 도시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외할머니집이 마음의 고향이요, 고향을 잃은 이에게는 평생을 살아온 곳이 마음의 고향이다. 옥천의 구읍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로 시작하는 <향수>라는 노래를 아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향수> 

비록 새로 지은 집이지만 정지용의 생가에서는 그의 흔적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옥천 구읍은 죽향1리와 3리, 상계, 하계, 문정1리 교동리 등 5개의 마을이 있지만 이 모두를 합쳐 그냥 ‘구읍’이라고 부른다. 구읍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옥천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곳에 옥천역이 들어선다 했을 때 마을주민들은 이를 반대했다. 이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을까? 1905년 옥천역은 현재의 읍내 자리에 들어섰고, 이후 옥천군의 주요 시설이 역 근처로 옮겨가면서 이곳은 ‘읍’이란 단어 앞에 ‘옛 구(舊)’자를 하나 더 붙이게 되었다. 

이렇게 과거의 명성만이 남은 구읍이 그나마 간간이 회자되는 이유는 정지용이 짓고, 후에 이동원, 박인수가 노래로 부른 <향수>라는 노래 덕분이다.‘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고,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정지용 생가 옆에는 정지용문학관이 들어서 있어 전문해설사와 함께 그의 일생과 시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정지용이 노래했던 그 실개천이 바로 여기일까? 그의 생가 옆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구읍의 중심에는 정지용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바로 옆에는 정지용의 문학 세계를 볼 수 있는 ‘정지용문학관’도 들어섰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구읍’은 몰라도 ‘정지용’과 ‘향수’는 알 터, ‘얼룩백이 황소’라 하면 “아, 거기!” 하며 알은체를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인 게다. 이런 구읍에 얼마 전부터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 이름만 들어도 거창한 이 상이 바로 옥천 구읍이 작년 새로 단 타이틀이다. 이 영광의 타이틀을 단 이유는 구읍에서 시작해 옛 37번 국도를 따라 장계관광지까지 이어지는 ‘정지용 향수30리길-멋진 신세계’ 덕분이다.  

<갈릴레아 바다>를 사이좋게 나누어 쓰는 미용실과 이용원. 하지만 부부는 아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이 변신은 3년 전부터 시작됐다. 옥천지역의 문화인들이 정지용의 시 세계를 그의 고향인 옥천에서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그 ‘프로젝트’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으나 향수 30리길의 시작인 구읍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재미는 금세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빨간 우체통이 아직도 건재하게 서 있는 구읍우편취급국의 간판 아래엔 ‘모초롬만에 날러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 가여운 글자마다 먼 황해가 남설거리나니…’로 시작하는 정지용의 시 <오월소식>이 적혀 있다. 오랜만에 편지를 받아본 마음이 저랬던가? 참말로 우체국과 잘 어울리는 시구이지 않는가. 

뿐만 아니다.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할 듯한 호프집의 이름은 ‘향수호프’이고, 고깃집 이름은 ‘얼룩백이황소정육점’이다. 옛 교동상회도 ‘진달래상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간판의 재미난 이름을 하나하나 살피며 길을 걷다보니 참으로 다정한 가게를 만난다. 

정지용의 시구를 가게 이름으로 지은 구읍 풍경. 사진 / 손수원 기자

‘갈릴레아미용실’과 ‘바다미용원’은 한 지붕 두 가게다. 미용실 간판은 분홍색, 이용원 간판은 파란색으로 남녀를 구분해 누가 봐도 각자 알아서 들어갈 자리를 말해준다. 이렇게 미용실과 이용원이 이웃을 하고 있는 것도 특이한 풍경이거니와 사이좋게 정지용의 시 <갈릴레아 바다>의 제목을 나눠 쓰니, 호기심이 발동할 수밖에 없다. 살짝 미용실 문을 열고 넌지시 사장님께 물어본다. 
“혹시 옆에 이용원 사장님하고 부부세요?”

사장님은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한 번 슥 훑어보더니 “부부는 아니고 그냥 이웃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바깥에서 보기엔 천상 금술 좋은 부부가 이웃하며 오순도순 살아갈 것 같았는데…. 그냥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참 귀여운 ‘풍랑몽 짬뽕’집. 옻해물짬뽕이 별미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 마을을 세 바퀴나 돌아보고 옛 37번 국도로 나선다. 지금에야 머리 위로 쭉쭉 뻗은 새로운 길이 났다지만 여전히 이 길은 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상춘객들이 낭만을 즐기는 드라이브 길이다. 

길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풍랑몽 짬뽕’이라는 간판을 만나 피식 웃어버렸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풍랑몽’이란 글자와 ‘짬뽕’이란 글자가 참으로 육덕지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탓이다. 게다가 발음도 웃기다. 식당 이름을 중얼거리니 자꾸만 ‘풍남몽 잠봉, 풍남몽 잠봉…’으로 읊어진다. 

이렇게 ‘풍남몽 잠봉’을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왼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금강 줄기와 만난다. 몇십 년 만의 한파라더니 금강도 꼼짝없이 꽁꽁 얼어버려 간혹은 강 한가운데서 얼음낚시를 즐기는 용감한 강태공들도 눈에 띈다. 겨울옷을 잔뜩 껴입은 금강은 어느 곳을 둘러봐도 멋진 풍경이다. 

시골 작은 정류소를 정지용의 책상으로 꾸민 작품. 사진 / 손수원 기자

이윽고 소정리 마을의 낡은 버스정류장에 이르렀을 때, 문득 정지용의 책상이 그대로 옮겨와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간이정류장을 활용해 서랍을 만들고 위에는 독서등과 잉크, 펜과 책까지 얹으니 정류장으로는 좁고 작지만, 소년의 책상으로는 참으로 크다. 그 옆에는 거대한 의자 모양도 만들어 두었는데, 의자 위엔 정지용이 즐겨 쓰던 모자가 놓여 있어 그의 부재를 느끼게 해준다. 

소정리를 지나 장계관광지로 발길을 돌린다. 장계관광지는 199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것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향수테마파크’란 이름을 달아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이곳은 정지용의 시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멋진 신세계’를 모티브로 꾸며졌다. 주차장의 작은 광장에는 정지용의 생애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상징물로 들어섰고, 맞은편엔 정지용이 글을 쓰던 원고지를 형상화한 ‘모단광장’이 들어섰다. 

옛 장계관광지에 꾸며진 ‘향수테마파크’에는 모단미술관을 비롯해 정지용의 문학 세계를 표현한 예술작품들이 들어섰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일곱 걸음 산책로’라는 이름을 붙인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 곳곳에서 정지용 시인의 시구를 만날 수 있다. 또한 그를 스승 삼아 문학의 길로 들어선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들도 조형물과 함께 만날 수 있다. 꼭 예술작품만 통해서 정지용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벤치 하나, 돌계단에서도 발길을 옮길 때마다 그의 흔적이 느껴져 이곳은 정지용의 시정(詩情)이 넘친다. 

옛 읍내, 옛 길, 옛 관광지. 그리고 정지용과 함께 떠올리는 옛 이야기…. 정지용이 고향마을을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 ‘향수30리길’이 있는 구읍의 풍경도 모두의 마음의 고향으로 차마 꿈에서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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