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특별한 여행] 태백으로 떠나는 스케치 여행의 매력
[특별한 여행] 태백으로 떠나는 스케치 여행의 매력
  • 오요나 기자
  • 승인 2010.04.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태백 스케치. 사진 / 오요나 기자

[여행스케치 = 태백] ‘여행은 다녀왔는데 제대로 된 풍경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혹은 찍어온 사진을 훑어보다 ‘내가 이런 곳도 갔었나?’하고 의아한 경험이 있다면 당신의 여행은 스테레오 타입에 빠진 것이다. 자, 여기 여행지를 색다르게 즐기는 이들이 있다. 카메라 대신 자신의 눈과 손으로 여행지를 기억하는 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카메라보다 스케치북
한 달에 한 번, 스케치북을 들고 여행을 떠난다. 강원도 태백으로 정기적인 스케치 여행을 떠나는 ‘태백그리기’ 작가들과 동행하는 자리다. 지난 2002년부터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서양화가 서용선 작가의 초대를 받아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부터 스케치 여행에 동참하는 행운을 얻었다.

‘태백그리기’는 서용선, 류장복, 이경희 등의 작가가 결성한 예술가 모임 ‘할아텍’ 에서 사라져가는 폐광촌 풍경을 화폭에 기록하기 위해 9년 전부터 매달 1회씩 태백을 찾아 풍경을 스케치하는 행사다. 그렇게 화폭에 담은 태백의 풍경을 크고 작은 전시회를 통해 선보였고, 오는 5월에는 100회를 기념하는 전시회를 대규모로 태백과 철암 일대에서 계획하고 있다.

스케치 여행은 가방에 스케치북이나 캔버스와 물감을 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가방에 그림 도구가 담겨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에 보이는 풍경이 여느 날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물론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도 느낌은 비슷하다. 그러나 카메라와 스케치북은 큰 차이가 있다. 풍경은 그냥 풍경이 아니라 카메라에 담고 싶은 풍경이 된다. 

카메라는 풍경을 눈 깜빡할 사이에 찍고 셔터를 닫아버리는 반면, 스케치북은 풍경을 계속 발효시킨다. 제과제빵을 예로 들면 빵과 케이크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효모를 넣어 오랜 시간 발효시키는 빵이 베이킹파우더를 넣어 순식간에 부풀리는 과자보다 깊고 풍부한 맛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카메라로 풍경을 찍고 나면 풍경은 바로 잊혀진다. 어떤 때는 뷰파인더를 통해 풍경을 보느라 맨 눈으로는 풍경을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나중에 사진 파일들을 정리하다 ‘이런 곳도 있었나?’ 싶을 때가 허다하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멋진 곳에는 스케치를 하는 아마추어 화가들이 있다. 이들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또다른 재미이다. 사진 / 오요나 기자

여행을 즐기는 후배 하나는 사진 찍기에 몰입하다 보니 정작 여행의 본질이 흐려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여행에 카메라를 지참하지 않는다고 한다. 눈으로 충분히 감상하고 나서 꼭 기록해두고 싶은 풍경은 스케치북에 드로잉한다는 후배의 말이 떠오른다. 

풍경을 그림으로 옮기다 보면 그 풍경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된다. 파란 지붕 집 옆에 노란 지붕 집이 있고 그 곁의 은행나무까지, 스케치북을 덮어도 머릿속에서 환하게 되살아난다. 빨리 기록하고 싶다면 카메라가 좋지만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스케치북이 효과적이다.

계절의 미묘한 변화를 온몸으로 만끽하는 시간
서울을 떠나 태백에 도착하기까지 여느 여행이 그렇지만 자동차 안에서 재잘재잘 수다꽃이 핀다. 그동안 쌓아놓았던 이야기들을 나누다 배가 고파질 즈음 휴게소에서 먹는 간식은 산해진미 저리 가라다.

여행지로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봄에서 겨울까지 계절이 흐른다. 계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스케치 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묘미다. 자연은 단 한순간도 같은 색을 보여주는 법이 없다. 조금씩 변화하는 색들이 망막을 통해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 햇살과 나뭇잎, 꽃, 강물 등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다 보면 그 옛날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연을 찾아 나섰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태백에 도착하면 맨 먼저 들르는 곳이 철암역이다. 1970년대 석탄산업이 활황이던 당시에는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을 만큼 돈이 넘쳐났던 이 도시는 석탄산업의 몰락과 함께 사람이 빠져나가 스산해졌다. 사람이 떠나고 남은 집들은 저절로 낡아가며 과거를 추억한다. 

여행지의 속살을 찬찬히 음미하는 데 스케치 여행의 묘미가 있다. 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사물들이 손끝에서 하나하나 살아난다. 사진 / 오요나 기자

현재 철암역 인근 빈집들은 개발의 논리에 밀려 하나 둘 철거돼 공원으로 바뀌고 있다. 얼마 후면 석탄도시였던 태백의 과거는 말끔히 지워져 찾아보기 어려워질 게 분명하다. 지난 10년간 부지런히 태백을 드나들며 기록해둔 할아텍 작가들의 그림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풍경과 시간을 동시에 기록해두는 작업, 그것이 바로 스케치 여행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스케치 여행에서는 각자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풍경 앞에 서서 스케치북을 펼친다. 누구는 석탄이 가득한 탄광 앞에, 누구는 폐허가 된 집 앞에, 누구는 구불구불한 길 앞에 선다. 같은 장소에 서서 같은 재료로 그림을 그려도 똑같은 그림이 한 장도 나오지 않는다. 마음의 필터는 이처럼 여과하는 힘이 크다. 

관광에서는 만날 수 없는 풍경이 드러나는 시간
스케치 여행이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다. 여행과 스케치를 철저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 여행은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보고 먹고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림은 늘 화실에 단정하게 앉아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려야 한다고 믿었다. 의자가 있어야 하고 화판이 있어야 하고, 앞치마가 갖춰지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화실에서는 그 누구나 그렇게 그림을 그렸으므로.

이같은 편견을 깰 수 있었던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태백그리기’ 선생님들 덕분이었다. 

사실 천재화가 피카소가 아닌 이상 아무데서나 스케치북을 펼치기가 힘들다. 더욱이 나만의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 특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전업 작가가 아닌 아마추어라면 더욱더.

멋진 데생을 그리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일단 스케치북을 펼치는 것!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진 / 오요나 기자

처음 스케치 여행에 동참했을 때는 선생님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실력이 만천하에 들통날 것 같아 차마 스케치북을 펼치지 못했다.

이런 나를 보고 한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는 행위다. 그러나 이같은 의식을 먼저 끊어내야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에야 용기를 내어 스케치북을 펼칠 수 있었다.

스케치 여행에서는 화실에서처럼 모든 조건을 갖출 수 없다. 서서 그려야 할 때도 있고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려야 할 때도 있다. 스케치북이나 캔버스를 땅바닥에 눕혀놓고 그리기도 한다. 앞치마를 두를 시간도 여유도 없다. 선생님들은 거침없이 온몸으로 그림을 그린다.

풍경으로부터 받은 감흥을 어떻게 스케치북에 옮겨놓느냐가 중요할 뿐, 그 이외의 조건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림 그리는 시간이 몇 배 즐거워졌다. 때문에 이제 어떤 여행에서라도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은 필수 지참물이 됐다.

관광이 아닌 진짜 여행
관광과 여행은 다르다. 그저 보고 지나는 것과 깊이 느끼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 스케치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이다. 관광에서 느낄 수 없는 내면의 울림을 느끼게 된다.

스케치 여행으로 찾은 태백은 관광차 들른 태백과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관광지로 방문했을 때의 태백은 스키장과 눈꽃축제, 해바라기축제가 열리는 도시였다. 때문에 콘도, 펜션, 축제장 등이 주 동선이었다. 그러나 스케치 여행에서의 태백은 태백의 본질에 좀더 다가가게 만든다. 폐광이나 채굴장, 시골마을, 산등성이 등을 찾게 된다. 전혀 다른 풍경 때문에 도저히 같은 여행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이처럼 풍경을 더 깊숙이 보게 되는 것도 스케치 여행의 매력이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보다는 환경이 열악하지만, 때로는 시공간을 잊고 몰두하게 된다. 사진 / 오요나 기자

스케치 여행의 마지막 매력은 모든 여행이 그렇듯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식도락에 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음식을 먹는 것으로 여행지를 음미한다. 태백에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무쇠보리밥집’의 곤드레나물밥이다. 커다란 대접에 담긴 곤드레나물밥에 무생채, 콩나물무침, 도라지나물 등을 넣고 슥슥삭삭 비벼 먹으면 몸이 저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너와집’의 산채비빔밥도 고향의 맛이 물씬 느껴진다.

이처럼 몸과 마음이 자연과 합일되는 기쁨을 만끽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세포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음이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와 스케치북을 책상 위에 올려두면 그림 속 풍경이 자연의 에너지를 전해준다. 자연의 한 조각을 떼어내어 내 방에 가져온 기분. 그냥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에너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