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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Part 1 토박이 추천 ①] 전주 속살 여행, 후미진 뒷골목을 따라 '숨은 전주 찾기'
[Part 1 토박이 추천 ①] 전주 속살 여행, 후미진 뒷골목을 따라 '숨은 전주 찾기'
  • 박연실 기자
  • 승인 2010.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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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빨랫줄이 걸려있다. 사진 / 박연실 기자

[여행스케치 = 전주] 나는 전주의 오래된 집에서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같은 풍경에 오래 머물다보면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 느린 걸음, 익숙한 풍경에 마음이 기울기 마련이다. 그래서 마음이 성급한 여행자라면 토박이의 시선을 따라 전주의 속살을 느릿느릿 산책하는, 지금 이 여행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나무와 토담을 따라 걷는 한옥마을 골목길 
전주가 전주인 까닭은 도시의 숨통을 트여 줄 소박하고 느린 골목길이 아직 남은 탓이다. 

그 ‘느림의 미학’이 흐르는 골목의 중심에는 한옥마을이 있다. 태조로를 따라 경기전과 전동성당, 오목대, 향교 등 조선 건국의 역사가 담긴 유적들을 끼고 오래된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이곳이 전주를 여행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일 테지만, 관광객을 위한 곧고 반듯한 길은 내가 일러줄 장소가 아니다. 

한옥마을 골목의 ‘명가의 사진’. 사진 / 박연실 기자

그 이면에 숨겨진 좁은 골목, 원래 살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 다져놓은 후미진 뒷골목을 따라가야 비로소 한옥마을의 진짜 속살을 엿볼 수 있다. 야트막한 담 너머로 오래된 냄새가 아련한 추억을 환기시키는 소박한 생활의 터전, 길을 알려주는 것은 표지판이나 랜드마크가 아니라 이웃이 살고 있는 색색이 다른 철문과 흙담인 그곳….

그중에서도 태조로에서 가로로 뻗어나간 한옥마을 구석구석을 관통하는 골목들이 정겹다. 관선길과 은행나무길 사이로 난 ‘토담길’은 이름 그대로 오래된 토담으로 이루어졌다. 그 옛날 누구의 손길이 이토록 정교하고 예쁘게 토담을 빚어놓은 것일까. 흙담에 새겨진 아기자기한 꽃무늬를 더듬는 일도 즐겁다. 

한옥마을에서 동문사거리로 이어지는 ‘동문3길’은 경기전 후문 방향으로 펼쳐진 도로변이다. 골목은 아니지만 길을 따라 만나는 오랜 건물들이 정겹다. 일제 강점기 건물인 ‘춘추당’과 그 옆에 ‘명가의 사진’이라 이름 붙여진 오래된 사진관에 놓인 흑백사진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400살이나 먹은 은행나무의 둘레는 두 사람이 팔을 맞잡아도 닿지 않을 정도다. 사진 / 박연실 기자

향교를 찾아가는 ‘향교길’은 한옥마을의 중심과 거리를 두고 있어서인지 마치 또 다른 과거로 들어서는 길목처럼 고즈넉하다. 길가에 자리한 ‘추억박물관’은 70년대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 <빨간 마후라> 포스터, 잡지 <보물섬>, 못난이 인형, 태권V 로봇까지 전시된 물건들은 평범하다 못해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 시절의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오목대 뒤쪽으로 난 ‘쌍샘길’은 예전에 샘이 있던 자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길 끝으로 가면 급격한 경사가 난 언덕에 오를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한옥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다. 

한옥마을의 속살은 이렇듯 좁은 골목과 녹슨 창, 철제 대문에 스민 옛 시간들과 조우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되새기는 또 다른 표지판이 있다면 바로 ‘나무’이다. 

몇 년 전 앙코르와트를 여행할 때, 사원을 양분 삼아 자라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에 넋을 잃고 나도 나무처럼 우뚝 멈춰버렸다. 무한하게 가지를 뻗어 사원을 파괴한 나무들이 다시 사원을 얽어매고 지탱하고 있는 모습. 무릇 신의 위엄은 몇 백 년에 걸쳐 지은 정교한 사원이 아니라 나무의 위대한 힘에 있다고 말하는 듯 거대한 시간이 나무에 새겨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한옥마을 골목 구석구석을 산책하는 것도 좋다. 사진 / 박연실 기자

한옥마을 은행나무길 중간에 우뚝한 은행나무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1383년 월당 최담 선생이 낙향한 후 심은 나무라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나무는 제 이름을 딴 길 위에서 묵묵히 시간을 되새기고 있다.

향교의 은행나무는 400살이나 되었다. 사람이라면 대여섯 번의 생을 거쳐 온 셈이다. 2m나 되는 나무의 둘레는 두 사람이 팔을 맞잡아도 닿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낙엽이 지는 가을이면 온통 노란색으로 둘러싸인 향교의 빛깔은 눈이 부실 정도다.

노송동, 마지막 남은 과거의 섬
한옥마을에서 아중리 방향, 그리고 그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중간 일대가 노송동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그 옛날에 늙은 소나무가 많아 ‘노송동(老松同)’이라 불렀다는데,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한옥마을의 매력이 적당히 포장되고 정리된 골목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즈넉함이라면, 노송동은 그보다 더 ‘날것’에 가까운 느낌이다. 

노송동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 있다. 가까이 붙은 집들은 낮은 언덕으로 이어지고 작은 골목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사진 / 박연실 기자

고층 건물에 둘러싸인 도시는 현대인의 눈높이도 점점 치솟게 한다. 하지만 파란 하늘을 한눈에 더듬는 것조차 어렵게 돼버린 사람들에게 노송동이 보여주는 스카이라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간결하다. 그야말로 전주에서 유일하게 남은 진짜 ‘동네’이다. 

그래서 노송동은 ‘전주의 섬’이나 다름없다. 물리적 분리가 아닌 시간의 분리가 만들어낸 섬이다. 노송동의 시간은 80년대에 멈춰 있다. 자음이나 모음이 하나씩 떨어져나간 간판들과 굳게 셔터를 내린 가게들, 녹슨 철대문과 말라죽은 화분들, 칠이 벗겨진 콘크리트 담장 너머로 보이는 아담한 정원, 그리고 빨간 고무다라이, 멈춰버린 이발관 사인…. 이런 낡은 풍경들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질투는 나의 힘>, <오래된 정원> 등 숱한 영화 속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전주에 마지막 남은 ‘진짜 동네’ 노송동의 시간은 80년대에 멈춰져 있는 듯하다. 사진 / 박연실 기자

언젠가 이 과거의 섬도 도시라는 육지가 잠식해버리고 말까. 전봇대마다 폐허의 낙인처럼 찍혀 있는 ○○용달, ○○이삿짐 같은 글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골목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저 멀리서 덜컹거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동네는 완벽한 정적 속에 있다. 한참만에야 그 정적을 뚫고 터덜터덜 골목길을 내려왔다. 노송동 골목을 벗어나자 풍경의 속도는 점차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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