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전국] 서양의 서학에 대항해 민족의 생존을 모색한 동학의 뒤를 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으나 친일 종교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한때 신도수 300만 명으로 기독교를 능가하는 교세를 자랑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근대라는 쓰나미 속에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했던 천도교의 총본산,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찾았다.
헷갈리기 일쑤다. 동학, 대종교,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이번 기회에 정리 한번 해볼까? 우선 공통점부터 짚어보자. 이 종교들은 모두 근대 전후 한반도에서 생겨난 자생적인 민족종교다. 동학에서 시작한 ‘후천개벽’ 사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특징을 보인다. 동학은 글자 그대로 서학(천주교)에 대항해 만들어진 종교다. 당시 ‘천주교=서양=침략 세력’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고 있었으므로 동학은 급속도로 민중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학 농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1902년 강일순이 창시한 증산교는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을 이어받았다. 강일순은 스스로를 상제(옥황상제)라 칭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 설파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1년 전에 나철이 설립한 대종교는 전통적인 민족종교인 단군신앙을 계승한 것이다. 민족의 위기 때마다 강조되었던 단군신앙을 무기로 일제와 싸우려는 의도가 강했다. 1916년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불교의 일파가 아니라, 한반도 전통의 유불선을 두루 합하여 태어난 새로운 민족종교다. 원불교의 상징인 일원상은 이러한 통합을 상징한다.
동학은 농민운동, 천도교는 3.1운동
천도교는 동학을 직접 계승한 종교다. 동학의 3대 교주였던 손병희는 교단 내에 침투해 있던 친일파들과 결별하기 위해 1905년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교단을 재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종교로서의 동학을 강조하고 제정분리 원칙을 천명했다. 이는 현실정치에 참여하던 친일파들과 선을 긋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포교활동을 강화해 교세를 확장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꾸렸다. 그렇다고 천도교가 종교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손병희는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여 장을 인쇄해 뿌렸다. 그렇게 천도교는 그리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앞에 있는 ‘독립선언문 배부터’라는 표지석에는 이런 사연이 깃들여 있다.
세계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내부는 여느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설교가 이루어지는 강대상과 교인들이 앉는 의자가 실내에 가득하다. 천도교는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심고(예배)를 올린다. 경전을 봉독하고 천덕송를 합창하고 설교를 듣는 구성이 기독교의 예배와 비슷하다. 다만 교회의 십자가가 있는 자리에 궁을 문양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궁을 문양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영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중앙대교당 앞에는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 기념탑이 있다. 이곳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선포한 인연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라는 인연으로 이곳에서 어린이날을 선포한 것이다. 지금은 기독교와 불교 등에 밀려 존재감 미미한 종교가 되었지만,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한 우리 민족 종교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