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서울] 정식 이름은 국립4.19민주묘지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는 ‘수유리 4.19탑’이 익숙할 것이다. 그래서 자주 잊는다. 수유리 4.19탑 옆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그러니 이곳을 잊혀진, 혹은 숨은 문화유산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야말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라 생각한다면 말이다.
아직 겨울 기운이 남은 어느 날,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았다. 하늘은 맑았으나 며칠 전 내린 잔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민주성지(民主聖地)’라 쓰인 표지석의 마지막 글자도 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민주성지가 된 것은 ‘군부독재’가 막 자리를 잡던 1963년의 일이었다. 4.19혁명 이듬해인 1961년 2월 국무회의에서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실 공원묘지의 설립을 결의했고, 5.16군사정변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이 부정 축재자의 수유리 땅을 국고로 환수한 후 1년 만에 묘역을 완성했다. 군부독재가 민주성지를 만든 셈이다.
표지석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벽돌과 철제 빔들로 만들어진 구조물들이 도열한 너머로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설 당시 시조시인 이은상이 지었다는 탑문은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기념탑 뒤로는 그날의 희생자들이 눈 덮인 무덤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진달래처럼 피어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날들이 필요한 듯하다.
민주화와 꼰대질
무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희생자들의 영정을 모신 유영봉안소가 있다. 빛 바랜 흑백사진 수백 장이 봉안소 내부를 도배하고 있었다. 까만 교복의 까까머리 학생들이 그 속에서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떠올라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김주열은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열 여섯 살의 민주열사. 그때는 데모가 대학생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고등학생도 중학생도,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를 향해 발포된 총알은 나이를 가리지 않았고, 희생자들 중에는 어린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알까? 지금은 ‘민주화’가 ‘꼰대질’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흑백 사진들을 뒤로 하고 잔디광장을 지나면 거대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총을 든 경찰들이, 다른 한 쪽에는 거대한 맨주먹 뒤로 학생과 시민들이 맞서고 있다. ‘자유의 투사’라는 청동상이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독재 권력과 맞서서 자유를 쟁취한 우리는 지금 자유로운가? 4.19혁명 이후 5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얼마만큼 더 자유와 민주주의에 가까이 다가간 것일까?
트집마라, 건설이다?
국립4.19민주묘지를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4.19혁명 기념관에서 그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4.19혁명의 배경과 내용 및 역사적 의의를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다’는 기념관에서는 당시 역사적 상황을 여러 자료들을 동원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중 낡은 선거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대통령에 리승만 박사를’이란 문구 옆으로 익숙한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위로는 처음 보는 선거 구호가 적혀 있었다. “나라 위한 80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 최근 대한민국을 세운 국부로 새롭게 추앙 받고 있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포스터에는 3.15부정선거의 주인공(?)인 이기붕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그 아래 달아 놓은 표어가 눈에 익었다. “트집마라 건설이다 ? 자유당” 몇 년 전 전국을 공사판으로 만들고 싶다던 정부의 대통령도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4.19혁명으로 무너진 자유당 시절에서 몇 걸음 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왔거나. 진달래꽃 피는 4월을 기다리는 국립4.19민주묘지는 아직 잔설이 분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