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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통마을] 동해안의 넓은 평야 영덕 괴시리 마을 이 전통마을엔 짭짜름한 바다내음이섞였네요
[전통마을] 동해안의 넓은 평야 영덕 괴시리 마을 이 전통마을엔 짭짜름한 바다내음이섞였네요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6.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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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동해를 끼고 있는 괴시리마을.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영덕] 전통마을하면 으레 기름진 평야와 넓은 강을 앞에 두고, 뒤로는 경치 좋은 산을 업고 있는 ‘배산임수’가 생각난다. 하지만 경북 영덕 괴시리 마을은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 넓고 푸른 동해가 바로 그것이다. 짭짜름한 바다냄새가 섞인 산들바람을 맞으며 마을로 들어섰다. 

전통마을이라 하기에 들어가는 길부터 짱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흙길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공용주차장에 차를 대고 먼저 마주한 것은 하얗게 잘 발라진 시멘트 길이었다. 조금은 실망이다. 하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지푸라기를 섞어 반죽한 흙으로 세운 담장이 눈에 뜨인다. 다행이다. 혹시 담장조차 거무튀튀한 시멘트로 쌓아놓은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이 되던 차였다.

동네는 텅 비어 있다. 조무래기 한둘이 골목에 나와 돌치기라도 하고 있을 법한데, 토담을 따라 골목길을 두 번이나 꺾어 돌아도 조무래기들은커녕 텃밭에서 소일거리하는 촌부 한 명 보이지 않는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 17세기말에 지어져 조선 후기 주택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잇는 대진항은 괴시리마을 만큼이나 조용하고 아늑한 포구이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 찰나에 마당을 가로질러 묶인 빨랫줄에서 기세 좋게 펄럭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흰 ‘난닝구’. 사람이 분명 살고 있는 마을이다. 하지만 정작 집주인은 보이지 않고 그 사정을 물어볼 길가는 주민마저 없으니 이거 난감할 따름이다.

일단 사람 만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대문 없는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담장 안에서는 마을의 적막을 깨는 형형색색 꽃들의 향연이 펼쳐저 있었던 것이다. 무심결에 들어서 마음의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차에 작은 놀라움이 번진다. 

200년도 더 된 고가옥의 툇마루에는 햇살이 지긋이 눌러앉아 있고 기왓장과 처마에서는 모진 세월을 이겨낸 고풍스런 멋이 풍겨져 나온다. 마당 한쪽에는 지금은 비록 뚜껑으로 꽉꽉 봉해놓았지만 작은 우물도 보인다. 

‘괴시동 물소와 고택.’ 이 집의 이름인가보다. 안내판에 친절한 설명이 적혀져 있다. 이 고택은 경북 문화재 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괴시리 마을에는 이렇게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고택이 16점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반듯반듯 시멘트길 옆으로 세워진 흙담은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아우른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물소와 고택을 가로지르는 작은 담. 왼쪽이 남자들의 공간. 오른쪽은 작은 우물 등이 잇는 여인들의 공간이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설명에 따르면 이 집의 구조는 참 재미있다. 당시의 유교사상에 의해 남녀의 생활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어 같은 집이라도 마당을 가로질러 6m 정도의 작은 담이 서 있다. 요즘 시대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설명을 생각하며 집 구조를 천천히 살펴보니 당시의 생활 모습이 한 폭의 민화처럼 그려진다.

괴시리의 고택들은 반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경북 양반마을의 주택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고택들은 모두 ‘ㅁ’자형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마을 앞 영해평야와 남동쪽 망일봉의 산세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휘두르고 있어 대부분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괴시리 마을은 원래 영양 남씨의 집성촌이다. 이곳 영해는 예부터 양반마을로 손꼽히던 곳으로 조선말까지는 영덕보다 더 큰 마을이었다. 영주, 봉화, 영양 등 산악지대에 있는 마을과는 달리 넓은 평야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해안에서 이런 평야를 안고 있는 곳은 강릉과 영해, 이 두 곳이 대표적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이해가 된다. 내륙이 아닌 바닷가 근처에 양반마을이 형성된 이유를 말이다. 전통마을이라 하면 안동이나 영주 같은 내륙지방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채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400여년간 영양 남씨가 세거했던 이곳도 세월의 흐름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거나 가까운 마을에 양옥집을 짓고 떠나기 시작했다. 자연히 빈집은 늘어갔고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비바람도 이겨냈던 고택들은 주인을 잃어버리자 힘없이 허물어져 갔다. 그러던 것을 95년부터 경상북도와 영덕군이 전통마을로 지정해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하고 있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마을 뒷산엔 팔석정이, 연못 위에는 목은이색기념관과 생가가 있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목은이색기념관에 걸린 영정.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괴시리 마을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고려 충신 목은 이색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괴시리’란 마을이름도 이색 선생이 희대의 문장가로서 원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歐陽博士) 구양현(歐陽玄)의 괴시 마을과 비슷하다 하여 고쳐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런 연유로 마을 뒷산에는 올해 6월 ‘목은이색기념관’이 들어섰다. 전시관 내에는 목은 선생의 영정을 비롯해 각종 유품과 관련 저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실외에는 목은 선생의 석상이 있고, 박물관 아래로는 팔각정과 작은 연못이, 길 따라 산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작은 휴양림 같다. 

기념관을 나와 다시 마을 입구로 향하던 중이었다. 오른쪽으로 오솔길이 하나 있어 무심결에 발길을 옮겼다. 아기자기한 정원에 야생화들이 가지런히 피어있어 민가인가 했더니, 작은 현판에 ‘영해 홍련암’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자그마한 암자였다. 

“아이고~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지나가는 손님을 알아채고는 서슴없이 방으로 들어와 차 한 잔하고 가라고 부른다. 어떻게 무슨 용무로 이곳엘 들렀는지 묻지도 않고 이렇게 반갑게 초라한 행색의 객을 맞아주니 감개가 무량할 뿐이다. 

“마침 공양하려던 참이니, 함께 하시지요?”
목마른 사슴이 일부러 샘물을 찾았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으니 취재의 피곤함이 싹 사라진다. 사실 무척 허기졌던 차에 찐 깻잎에 된장찌개, 살이 통통하게 오른 풋고추와 빨간 고추장의 조화는 거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반가웠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아기자기한 정원 안에 숨겨져 잇는 영해 홍련암. 만귀 스님이 이곳에 들르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홍련암에서 바라보면 괴시리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2006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공양을 마치고 바라본 마을 하늘에는 낙조가 번지고 있었다. 넓은 영해평야, 그리고 그보다 멀리 동해바다 위에서 붉게 번지는 노을은 고풍스런 기와지붕과 어우러져 몇 백 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비록 고택의 건축적 양식이라든가 역사 속의 괴시리 마을은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괴시리 마을에는 고요한 아름다움과 희로애락의 풍파를 거뜬히 버텨낸 세월의 깊이가 있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나그네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넉넉한 인심이 있고, 기름진 평야 위에 그윽하게 번지는 낙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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