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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테마여행]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만나는 강릉여행 대갓댁 두 여인, 어찌 이리도 달랐을까
[테마여행]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만나는 강릉여행 대갓댁 두 여인, 어찌 이리도 달랐을까
  • 이수인 기자
  • 승인 2006.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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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강릉 선교장의 모습.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여행스케치=강릉] 조선중기를 살다간 강릉 출신의 신사임당은 전형적인 현모양처이자 재능있는 예술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삶을 살았던 반면, 허균의 누이 난설헌은 같은 양반가의 자손으로 탁월한 재능을 지녔지만 극단적으로 불운한 삶을 살았다. 60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 여성이 왜 이토록 다른 삶을 살았을까?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사임당의 초충도.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유연한 시대에 재능을 꽃피운  신사임당
뜰앞을 내다보니 밤사이 배롱나무가 농염하던 꽃잎을 떨어뜨렸다. 이제야 제 차례가 왔다는 듯 맨드라미는 오늘따라 유난히 붉다. 어디 마실이라도 가는 길인지 개구리 한 마리가 펄떡펄떡 뛰어오더니 갑자기 길을 멈춘다. 향을 찾아 날아든 나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두빛 맨드라미를 쳐다본다. 그 희한한 광경을 지켜보던 사임당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진다. 이제 막 글을 배운 현룡(율곡의 아명)의 글읽는 소리가 가만히 별당의 담을 넘고 있다.

신사임당의 외가이자 친정인 오죽헌은 외고조부인 최치운에 의해 지어졌다. 오죽헌은 본래 사임당이 머물던 별당건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왼쪽 2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방에서 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았다 하여 몽룡실이라 부른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맨드라미가 핀 화단 앞에 사임당의 초충도가 세워져 있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사임당이 머물던 별당인 오죽헌이 나온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별당 오른쪽에는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이곳은 원래 어제각이 있던 자리였다. 

정조 임금은 율곡 선생의 친필서 <격몽요결>과 어린 시절 쓰던 벼루를 보고, 그 뒷면에 선생의 학문을 찬양하는 글을 써서 돌려보내며 별도의 집을 지어 보관하라 명했다. 이때 지은 전각이 어제각이다. 그러나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어제각을 안채 옆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문성사라는 사당을 지었다. 율곡 선생이 태어난 몽룡실 바로 옆에 사당을 모시고자 한 뜻이겠지만 옛 임금의 영을 받든 전각을 굳이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덕이 높은 현부인이요, 지극한 효녀이면서 어진 어머니로 알려진 신사임당은 여자는 학문을 하지 않는다는 당시 금기를 깨고, 스스럼없이 시문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등 예술혼을 발휘하였다. 게다가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7남매를 모두 훌륭히 키워낸 한 마디로 슈퍼우먼이었다. 그런데 신사임당의 삶을 눈여겨보면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결혼과 동시에 ‘출가외인’이 되어 오로지 시댁에 헌신했을 법한 사임당의 삶의 중심이 시댁이 아닌 강릉 친정에 있었다. 이 뜻밖의 사실이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결혼풍습과 사회 상황을 알아야 한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신사임당 동상.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율곡 선생의 친필서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고 있는 어제각.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사임당이 태어난 1504년은 조선이 세워진 지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로 어느 정도 국가의 틀이 완성된 후이다. 그러나 아직 고려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어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즉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사임당은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인 19세에 이원수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그해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강릉에서 3년상을 고스란히 치른다. 아들이 아닌 딸이, 그것도 갓 결혼한 출가한 딸이 친정아버지의 3년상을 치른다는 것 자체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여성들을 옭아매는 유교개념이 당시 확고히 자리잡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상을 치른 후에도 친정과 파주 율곡리 등을 오가며 살았는데, 이 시기가 자녀교육은 물론 예술인로서 많은 작품활동을 한 시기로 보여진다. 마침내 38세에 이르러 서울 시댁으로 완전히 생활을 옮기니 결혼하고 20년이 지난 후이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경포대 가는 길.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규방의 고독 속에 갇힌  허난설헌
초당 옆 오솔길에 들어서자 향긋한 솔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갯가에 앉아 비단옷을 빨던 초희(난설헌의 아명)가 잠시 먼 산을 바라본다. 산 너머 지나가는 흰 구름이, 구름을 몰고 가는 상쾌한 바람이 초희의 시선을 빼앗고 마음을 빼앗는다. 

‘아차! 오늘 균이의 시문을 봐주기로 했는데 그걸 잊고 있었네.’ 
집으로 향하는 작은 아씨의 마음이 다급하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누이에게 보여줄 자신의 시가 썩 맘에 들었던지 어린 균이 의기양양하게 시문을 내보인다. 
“그래, 잘 지었다. 그런데 한 구가 잘못되었구나.”
“어떤 어구가 잘못되었는가?”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 이 구절을 이리 바꿔 보는 것이 어떠하냐?” 
초희가 붓을 끌어 고친다.
‘문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질 하면서 가버렸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난설헌의 초상.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조선 유교사회에서는 남자는 솟을대문으로, 여자들은 작은 뒷문으로 출입해야 했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난설헌은 경포대 남쪽 마을 한 초당(草堂)에서 태어나 7살 무렵까지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을 노래한 난설헌의 시를 보면 어려서 보고 자란 초당과 경포호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담겨 있다. 그러나 당시 초당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기와집이 남았으니 이 집에서 난설헌이 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난설헌이 나고 자란 초당 솔밭을 걸으며, 정한의 삶을 영롱한 언어로 채색한 그의 문학적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큰 기쁨이 아니겠는가.

주차장을 빠져 나오자 길이 생가터의 협문으로 이어진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 남자들은 솟을대문으로, 집안의 여자들은 안채로 이어지는 작은 문으로 출입했다는데, 외지인이 이곳으로 들어서는 건 예의가 아니다.

조선의 여성으로 중국과 일본까지 명성을 날린 위대한 시인을 이리 무례히 만나러 가도 되나 싶은데 이미 발은 문을 넘어섰다. 양쪽으로 세워진 높은 벽을 지나자 안채로 이어지는 또 다른 문이 나온다. 여성의 활동을 규방으로 제한해 옴짝달싹 못하도록 여성을 묶어놓았던 조선시대는 그들의 거처조차 이렇게 높은 벽을 쌓아야 했나 보다. 

안채 마당에는 연분홍빛 나리꽃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안채 툇마루에는 난설헌의 시가 액자로 세워져 방문한 이들의 발길을 끈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안채 툇마루에는 난설헌의 한문시가 번역되어 액자에 세워졌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생가터 뒤의 솔숲. 오솔길 너머 갯가에서 어린 초희가 빨래를 하고 잇을 것만 같다. 2006년 8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난설헌은 당대의 석학인 아버지와 오빠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들으며 자랐다. 특히 글재주가 뛰어나 여신동이라 불리었는데,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누이의 탁월한 시재에 대해 ‘경번(난설헌의 자)의 글재주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고 적고 있다. 난설헌은 15세에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강남곡>에 따르면 ‘어찌 알았으리 나이 열다섯 살에 조롱받는 사내에게 시집갈 줄이야’라고 한 내용은 원치 않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으로 보인다. 

재주와 인물이 아내보다 못한 것에 열등감을 느꼈을까. 남편은 보란 듯이 외도를 하며 밖으로 떠돌았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먼저 보내고, 어렵게 얻은 뱃속의 아이마저 사산하였다. 그런 그녀를 시어머니가 곱게 보았을 리 없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 하나 없는 시댁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지만 ‘출가외인’인 까닭에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시대가 원치 않는 천재성을 지녔던 난설헌은 자신의 박복한 삶을 언어예술로 승화시키며 마치 삶을 달관한 초인처럼 시인으로 살다가 홀연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우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누이의 죽음 뒤 동생 허균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거나 외고 있던 시, 중국 시선(詩選)에 올랐던 누이의 시 등을 묶어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다. 

고작 60년의 시간차를 두고 명문가의 두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그 60년은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이 급속히 뿌리를 내리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앞서 좀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시대를 산 사임당은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여인상으로 지금까지 추앙받게 된 반면, 난설헌은 여성에게 주어진 질곡과 사회적 제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사라져간 불운한 여인의 표상이 되었다. 만약 사임당과 난설헌이 지금의 시대에 같이 살고 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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