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산청] 겨울산행이 그다지 만만하지 않은 산행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추위를 극복하는 힘든 산행 끝에 볼 수 있는 자연의 신비와 마력에 끌려, 산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면 다시 산행을 계획하곤 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소복이 쌓인 호젓한 눈길을 한걸음씩 푹푹 내딛는 기분과 눈보라와 악천후를 극복하는 기쁨, 그것이 겨울산행의 진짜 맛인 듯하다.
우리 부부의 첫 겨울산행은 7년 전 지리산 천왕봉 신년 일출산행이었다. 안내산악회에 한 달 전에 신청을 하고 나서, 10년이 훨씬 넘어 먼지가 뿌옇게 쌓인 커다란 배낭에 물을 가득 채운 페트병을 넣어 매고는 앞산으로 연습을 다녔다. 주변 분으로부터 조금은 과장된 엄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악등반대회 나가냐?’는 말까지 들으면서도 연습은 별 탈 없이 끝났고, 12월 31일 만반의 준비를 한 끝에 버스를 탔다. 내 배낭은 1박을 하고도 남을 크기였다. 구식 필름카메라와 캠코더, 아기담요와 오리털파카, 보온병 큰 것 2개와 오버트라우저 상하의 2벌, 여벌 장갑 2켤레 등이 담겼다.
산행 10분 만에 아내는 산멀미를 했다. 내 배낭 위에 아내의 배낭을 얹고 줄이 끊이지 않는 중산리 오름길에서 헤어진 뒤 이튿날 정오가 되어서야 장터목 산장에서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정상을 향한 수많은 인파 때문에 천왕봉에 오르지도 못한 채 나뭇가지 사이로 해돋이를 봐야 했었다. 카메라와 캠코더는 꺼내보지도 못하고 혼자서 헉헉대며 올랐던 그 해 첫 일출산행이자 겨울산행은 여러모로 두고두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겨울에는 산행을 안하는 것으로 알았다. 추운 겨울에 뭐 볼 것 있다고 사서 고생을 하겠느냐고 반문했었다. 하지만 겨울산행을 하면서부터 그 숨은 매력에 빠져 겨울이 오기만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사시사철 변화하는 산의 모습 중 가장 멋진 모습이 겨울산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 극한의 추위와 싸우며 눈물·콧물 쏟아 내면서도 그 찬란한 비경에 몸서리치는 게 겨울산행이며 일출산행이라고 믿게 되었다.
날씨는 산신령의 소관이라고 여겨 온 터라, 사람이 받은 날씨는 어쩔 수 없이 짖궂을 때도 많다는 것도 느꼈다. 일요일에만 아내와 같이 산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일요일에 좋은 날씨와 풍경을 접하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아내와 함께한 두 번째 천왕봉 일출산행이 그랬다.
재작년 신년 일출을 남덕유산에서 조망이 거의 없는 강추위 속에서 보내고는, 그 다음 주에 지리산 천왕봉을 택했는데 산신령은 우리를 허락하셨나 보다.
중산리에서 칼바위를 지날 때까지는 어찌나 세찬 바람이 불던지 숲이 징징 울어댔다. 한번 울어대면 마치 동해바다 거센 썰물이 밀려오듯, 장마철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가 나듯 숲은 요동치고 울어댔다. 숲이 운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서럽고 무섭게 울었으니까.
지리십경 중 1경이라는 천왕일출은 한 그루 구상나무를 배경으로 찬란하게 솟았다. 잔가지에도 눈이 소복이 얹힌 상태로 붉은 색의 눈을 바라보며 울었다. 손과 발이 깨지도록 시려서 울었다. 찬란한 해돋이의 광경을 보며 통증에 울고 가슴 벅찬 환희에 울었다.
콧물이 흘러 옷깃에 닿으면서 고드름이 되었고 장터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발의 감각이 어둔한 가운데 아이젠은 더욱 조이는 느낌이고 다리 끝에 한짐은 붙들어 매놓은 것 같았다. 세석평전으로 가는데 눈꽃사이로 남해바다가 선명하게 바라보였다. 햇살이 경사지게 비출 때 산 실루엣은 더욱 강해지는데, 넘실거리는 근육질의 지능선이 파란 하늘빛과 더불어 장관을 이루었다.
걷기 좋은 연하선경을 지나면서 거림으로 하산하는 길만 남았다는 안도감에 천왕봉을 뒤돌아보니 천왕봉은 날등처럼 세워져 보였다. 북쪽과 남쪽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은 넙적한 형태인데 상당히 급하게 남쪽으로 깍아지른 모양이다. 높은 산에 오르면 멀리 보인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천왕일출 연하선경 외에도 조망을 하는 즐거움과 함께 산의 면모를 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겨울산행은 2년 전 덕유산 향적봉 산행이다. 얼굴까지 가린 모자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싸라기 눈보라를 마주하며 오른 끝에 당도한 향적봉은 온통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말짱하던 하늘이 해뜨기 직전 시작하는 일종의 일출쇼로 요동을 친다. 구름이 순식간에 밀려와 앞을 분간 못하게 시야를 가리고 견디기 힘든 바람과 추위가 밀려온다. 그러기를 30여분. 다시 하늘은 원색의 파랑물감으로 물들고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상이 펼쳐진다.
봄에는 연분홍 꽃이 매달렸던 철쭉나무는 산호초가 되었고 제법 덩치 큰 나무는 아예 눈무더기로 변해 있었다. 사마귀 모양의 고사목은 흰색 옷으로 갈아입고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며 손에 들린 손바닥만한 디카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몰랐다.
손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 가랑이에 손을 넣어 쭈그리고 이를 악물기를 수십 번. 눈물콧물이 범벅된 와중에도 비경을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마구 눌러댔다. 그 날의 눈꽃은 눈이 얹힌 형태의 것이 아닌 나무서리꽃(상고대)과 얼음꽃(빙화)이었다. 폭설이 내린 후에 몇 날 며칠을 녹으면서 다시 얼고 그 위에 수분이 엉겨붙어 만든 천혜의 비경이었다.
구름이 걷힌 덕유의 장쾌한 주능선 북서쪽에서 한줄기 바람이 눈을 쓸어 사면을 타고 날리는 광경은 주변의 사진가들도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오수자굴로 하산하는 도중에는 어느 산객이 30년 산행경력에 처음 보는 광경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비경이 있었다.
숲이 온통 얼음막대기가 되어 바람에 약간 흔들리면 샹들리에의 유리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온 산을 뒤덮었다. 심하게 부딪힌 나뭇가지는 얼음조각을 바닥에 내려쏟아 바닥에는 온통 얼음막대기가 쌓여갔다. 숱한 겨울산행을 했지만 그런 신비한 광경은 정말이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앞서가는 아내의 넓어진 뒷모습이 측은하게 여겨져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가슴이 울컥했던 기억이 생생하던 21주년 결혼기념 추억산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