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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3·1절 기념 특별 리포트] 하늘 아래 편안한 땅 천안 역사 현장 탐방 독립기념관에 가보셨습니까? 
[3·1절 기념 특별 리포트] 하늘 아래 편안한 땅 천안 역사 현장 탐방 독립기념관에 가보셨습니까? 
  • 송수영 기자
  • 승인 2007.0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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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3월. 사진 / 양미경 작가
독립기념관 앞 휘날리는 태극기. 2007년 2월. 사진 / 양미경 작가

[여행스케치=천안] 서울 살아도 정작 남산타워 한 번 못 가본다고 하더니, 이 땅에 살면서도 막상 독립기념관을 찾아본 적이 없다. 가끔씩 경부고속국도의 <독립기념관> 방향 표지판을 볼 때마다 한번쯤 가봐야겠다 생각은 하지만, 항상 그 순간 뿐이었다. 

#1. 난생 처음 가본 독립기념관
월드컵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지난여름 베를린 시내를 관광하다 생각치도 않게 <홀로코스트 추모관>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짧은 시간 여러 곳을 돌아야 하는 일정이라 그냥 건성으로 외견만 보고 가려는데 잠시라도 꼭  둘러보고 가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독일인 안내원의 말에 결국 마음을 바꿔 기념관까지 둘러보게 되었다. 

2007년 3월. 사진 / 양미경 작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와 기도하는 양손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겨레의 탑. 2007년 2월. 사진 / 양미경 작가

그리고 한 10분 휘리릭 보고 가야겠다던 것이 한 시간을 넘겨 두 시간을 넘긴 뒤에도 쉽게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와 돌이켜보니 당시 들른 베를린 내의 수많은 명소들 중에 우연히 들른 이 추모관이 가장 인상에 또렷이 남아 있다. 총 2,711개의 묵직한 검정색 콘크리트 기둥이 쭉 늘어서 있는 장엄한 광경도 그렇거니와(이는 죽은 유대인을 추모하는 의미라고 한다) 기념관에서 본 전시물은 전쟁의 참혹함과 아픔이 충격이다 싶을 만큼 생생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사’와 함께 오늘을 사는 독일인의 자세였다. 그들은 이곳 외에 <유태인 기념관>까지 세워놓고, 자신들은 물론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널리 개방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어쩌면 저렇게까지 잔혹할 수 있는지 인간에 대한 회의마저 들게 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자신들의 과오를 낱낱이 드러내고 반성하는 모습에선 용서와 신뢰의 싹이 움텄다. 그냥 무심코 지나치려는 동양 여행객의 발걸음을 굳이 돌리게 하여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꼭 보고 가게 만든 그 안내원이 어쨌든 두고두고 고마웠다. 

2007년 3월. 사진 / 양미경 작가
대한임시정부의 활동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007년 2월. 사진 / 양미경 작가

묘비를 연상시키는 기둥 조형물 사이를 돌며 불현듯 일본에 이런 추모 시설 하나 지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우리에겐 이중으로 뼈아픈 상처다. 기념관 입구에 비치된 일본어 팸플릿을 보며, 그들이 이곳을 어떤 마음으로 둘러볼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역사를 잊어버린 것이 과연 일본인뿐이었을까 하는, 목구멍의 가시 같은 물음이 함께 되돌아왔다. 시원스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리고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한번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아직 봄이 찾아오지 않은 천안 독립기념관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휑덩그레했다. 건립 초기에는 전국에서 관광버스가 줄지어 밀려들고 발 디딜 틈 없이 관람객이 들어차더니 어느덧 건립 20주년이 되었다는 이곳엔 지역 주민과 몇몇 노인분들만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매표소 저 너머로 3·1절 기념식 행사나 광복절 행사에서 자주 보았던 파랑 기와의 <겨레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쪽으로 파도처럼 넘실대는 태극기의 물결. 두 번의 월드컵을 통해 친숙해진 탓인지 이제는 격의 없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겨레의 심장 밑을 한참동안 걸어본다. 이곳에 서니 3·1 운동 당시는 물론이고 불과 육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깊숙이 숨기고 다녀야만 했던 아픈 과거가 새삼 그려진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전국에서 떨쳐 일어나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고 한 목소리로 ‘만세’를 부른 그 실상에 세세하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들은 이념 교육을 받은 이들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그저 땅을 갈던 농부였고, 매일 냇가에서 식구들의 옷가지를 빨던 아낙네였고, 소를 팔던 거간꾼이었다. 그저 순박하게 살던 백성들이 날 선 총칼 앞에 저항을 했다. 그것도 살생하는 무기로 맞선 것이 아니라 그저 두 손을 번쩍 들어 ‘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평화적인 대항. 

통신 기술도 발달하지 않았던 그 당시 일제의 눈을 피해 그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나, 비폭력의 저항을 했다는 것, 일부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서 골고루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하나를 되새기다 보니 왜 이제까지 그 정신의 숭고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지 오히려 그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2007년 3월. 사진 / 양미경 작가
일본 헌병에게 잡혀가는 독립투사이 모습을 재현한 전시품. 2007년 2월. 사진 / 양미경 작가

<겨레의 집> 뒤편에 본격적으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3·1운동관, 독립전쟁관, 일제 침략관, 민족전통관, 임시정부관 등의 전시관이 세워져있다. 한곳 한곳을 둘러보는 동안 <백범일지>의 구절구절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한번 와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을 나서면서 몇 가지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사적들이 역사의 교훈을 일깨우긴 하지만, 이곳은 전체적으로 구성이 권위적이고 도식적이고 평면적이다. 때문에 그 이상으로 감동을 증폭시키는 울림이 적다. 눈에 익은 우리의 전통 전물 양식에, 대표 조형물이 있고, 몇 개의 전시관이 서있는 너무나도 ‘틀에 박힌’ 공식인 것이다. 독일의 유태인 기념물들이 그 자체로서 큰 예술적 가치를 지니며 중요한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것을 떠올려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이곳을 둘러보고 ‘왜 국가 건축물들은 한결같이 상투적으로 지어지는지 아쉽다’며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남긴 한 아마추어 여행가의 글이 떠오른다. ‘동양 최대 규모’가 내실을 담보하지는 않는 것. 한번 보고 이제 다 보았다고 발길을 끊거나 몇몇 국경일에만 몰렸다가 다른 날엔 썰렁한 그런 ‘독립기념관’이 아니라 몇 번이고 둘러보고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은 ‘독립기념관’이 될 수는 없을까, 내심 안타까워하며 발길을 병천 아우내 장터 쪽으로 옮긴다.

#2. 하늘 아래 편안한 땅 천안
“천안은유, 한자로 풀어보면 하늘 아래 편안한 땅이라는 뜻이어유. 말 그대로 진짜 여기는 자연재해라는 게 한번도 없었슈. 풍수지리가들도 다들 이곳이 좋은 지리라고 허지유. 그래서인지 여기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났슈. 류관순 열사도 그렇구, 이동녕 선생에, 왜 어사 박문수 있잖유 그분두 여기 출신이유.” 

택시 운전을 하시는 류맹석 선생의 느릿하면서도 구수한 사투리가 정겹다. 이분은 류관순 열사의 팔촌에 해당하는 친척이란다. 독립기념관에서 병천으로 향하는 택시 안이 그분의 사투리로 더욱 푸근하다. 

2007년 3월. 사진 / 양미경 작가
'유관순 열사 추모각' 분향대가 마련되어 있다. 2007년 2월. 사진 / 양미경 작가

“예전 병천 오일장이 엄청 컸슈. 아무튼 2도 8개면 사람들이 죄다 모였으니께. 그곳에서 선거유세 한번 하면, 아유 사람들이 구름처럼 떼로 몰려들었다니깐유. 그러니께 거기서 만세 운동을 하게 된 거유. 워낙 사람들이 몰려들던 자리여서.”
“아, 예~.”
“류관순 열사가 사시던 동네가 집성촌이유. 류관순 열사가 만세 운동할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문중 젤 위의 몇 분들에게 알리면 비밀이 철통같이 지켜지면서 순식간에 말이 퍼졌던 거지유. 그 삼엄한 일본 순사 놈의 감시를 그렇게 해서 속였던 거유. 어찌됐던 그 만세 운동으로 그 집안은 완전 박살이 났잖유. 하긴 집안이 흔들린 게 어디 그 집뿐이겠슈. 여그는 골목골목이 다 순국열사 집안이유.”

택시는 병천 아우내 장터로 들어서 예전 무시장이 있었다는 삼거리를 돌아 류관순 열사 추모각에 닿았다. 입구에서 사당까지 가지런히 길이 정비되어 있고 계단을 오르면 언덕 끝에 단아한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사당에 분향을 하고 오랫동안 영정을 바라보았다. 학창 시절 교실 벽면에서 항상 보았던 그 얼굴보다 훨씬 앳되다. 그러고 보니 일제의 고문으로 명을 달리했을 때의 나이가 고작 열여덟이었다. 요즘 같으면 아이돌 스타에 한참 빠져 있을 아직은 앳된 나이…. 

2007년 3월. 사진 / 양미경 작가
독립운동가들의 실물을 재현한 인형. 2007년 2월. 사진 / 양미경 작가

서울역에서 차를 타고 가는데 관순이가 그래요. “애들아 이 차 소리가 어떻게 들리니?” 그러니까 어떤 아이가 “동전 한 푼 동전 두 푼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랬더니 관순이가 “내 귀에는 대한독립 대한독립이라고 들린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손뼉을 치고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지요. 그랬더니 차장이 오더니 “학생들 나 좀 살려 달라. 이렇게 하면 차가 통과할 수가 없다. 마음으로 하고 입으로는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아저씨 가고 또 우리가 대한독립을 불렀지요. 
- 유관순 열사의 생존 친구 보각 스님 인터뷰 중에서, 2006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사당을 내려오니 그 주차장 앞마당으로 이 동네 주민인 듯한 여성이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저쪽으로는 물통을 들고 약수를 뜨러 가는 아주머니 모습도 보인다. 잠시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계단에 앉아 널리 시내를 굽어본다. 어머니 품속처럼 부드러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저 멀리 만세 운동을 했다던 아우내 장터도 한가롭게 저녁을 맞고 있다. 류맹석 선생 말대로 이 땅은 하늘 아래 편안한 땅이다. 그리고 다시는 역사의 뼈아픈 상처가 없어야 할 우리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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