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부안] 은은한 전나무 향으로 몸을 추스르고, 내소사 대웅전의 꽃살에 마음을 비우니 능가산 자락에 핀 단풍빛이 한층 선명하다. 가을, 이보다 더한 사치가 어디 있으랴.
숨겨둔 보물 내소사
사시사철 관광객이 몰리지만, 특히 가을이면 최고의 단풍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버스가 줄지어 들어오는 곳이 남도 땅이다. 단풍하면 첫손으로 꼽히는 내장산과 백양사가 있고, 시인 서정주가 사랑한 선운사는 향긋한 복분자주의 향기까지 어우러져 뿌리칠 수 없는 화려함으로 유혹한다.
이 두 곳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정갈하고 넉넉한 품새로 놓치기 아까운 명소가 있으니, 바로 내소사이다. 내장산이 화려한 파티복과 같다면 내소사와 능가산은 누님의 오래된 스웨터 같다. 편안히 트레킹을 하기에 좋고, 다른 곳과 달리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대웅전의 자태도 은은하다.
내소사는 침엽수 향이 은은한 전나무 숲길로 시작된다. 약 60여 년 전에 인공 조림한 전나무가 지금은 우뚝 거목으로 성장하여 하늘을 다 덮을 듯한 기세로 약 500m가량 이어진다. 때문에 내소사는 이른 아침에 돌아보는 것이 좋다. 조금은 한적하게 신선한 공기에 온몸을 완전히 맡기다보면 선경(仙境)에라도 온 듯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보기에도 시원하게 쭉쭉 뻗은 전나무 숲이 끝나면 이번엔 벚나무와 단풍나무의 차례다. 아직 가을의 초입이라 본격적으로 홍상(紅裳)을 갈아입지 않았지만 저리 웃자란 가지의 잎엔 분명 가을이 앉아 있다. 흙길을 유유히 걷노라니 저 앞에서 동그란 눈의 청솔모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내소사를 다녀온 블로거들이 ‘내소사는 나무가 특히 좋다’고 한결같이 평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겠다.
새로운 인연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에 창건된 절이다. 뒤로 능가산이 아늑하게 펼쳐져 그 품에 안겨 있는 듯 한눈에도 지세가 좋다. 뜰도 넉넉하고 ‘할아버지 당산목’이라 불리는 수령이 700년 된 느티나무와 천 년이 되었다는 ‘할머니 당산목’, 봉래루 앞마당의 기이하게 생긴 거목 등을 비롯해 여기저기 역사 깊은 나무들이 많다.
여기에 더해 아무리 바빠도 찬찬히 봐야 할 곳이 있으니 내소사 대웅전이다. 평생 자식과 지아비에게 다 내주고 흰 치마저고리 한 벌 달랑 남은 어머니 모습처럼 단청이 모두 벗겨진 모습으로 묵묵히 서 있다. 그 모습을 일러 누군가는 ‘무소유의 경지’를 보았다 하기도 한다.
처음 내소사 대웅전을 본 사람들은 단청이 없는 수수한 모습에 한 번 놀라고, 복잡한 다포식으로 능수능란하게 곡선을 연출한 지붕의 아름다움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모든 구조를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만 짜맞추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솜씨는 대웅전 전면의 문에서 절정을 이룬다. 나무를 마치 떡 주무르듯이 하여 꽃으로 만들어놓았다. 우리나라 장식 무늬의 최고로 인정받는다는 그 문양이다. 온갖 풍상을 다 겪고도 여전히 청초하게 피어 있는 모습. 시인 김경윤은 “눈발이 성성한 한겨울인데도 내소사 대웅전 창살에 국화꽃이 만발했다기에 우두커니 염불 소리 밟고 꽃밭에 갔지요”라고 이 창살을 노래한 시를 쓰기도 했다.
법당 안의 ‘백의관음보살상’도 찬찬히 훑어본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라고 한다.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참 아름답지요?”
어느 틈에 곁에 오셔서 설명을 해주시는 정오 스님.
“템플 스테이 왔어요?”
“아니오.”
“안 바쁘면 관음봉을 배경으로 나 사진 한 장만 찍어주소.”
천진한 스님의 웃음을 담아 찰칵. 새로운 인연이다.
가을 산의 정취
조금은 때 이른 가을 산의 정취를 얼른 만끽하고 싶어 산행을 서두른다. 호남평야를 사이에 두고 호남정맥 줄기에서 떨어져 있는 능가산(508m). 내소사를 뒤로하고 울창한 전나무 숲을 가로질러 산으로 향한다. 정겨운 오솔길이 이어지고 그 길가로 살짝 붉어진 단풍잎이 더 애간장을 간질이는 듯하다. 어느덧 슬슬 땀이 흐르는데, 간간이 바람이 부니 더욱 볼이 간지럽다. 걸음을 서두르다 자칫 주마간산격으로 가을을 흘려보낼까 싶어 거북마냥 걸음 속도를 조절한다. 가을 단풍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내장산과 설악산보다 이곳은 한결 한적해서 산행하기가 좋다.
내소사에서 관음봉을 오르는 길에 직소폭포가 있다. 변산팔경 중에 제1경으로 손꼽히는 곳이니 그 아름다움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높이 22.5m의 높이에서 암벽을 타고 쏟아지는 물소리가 오감을 압박한다. 올해는 비가 특히 많이 내려서 더 그렇지만, 원래부터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단다.
직소폭포에서 그리 높지 않은 재백이 고개를 넘으면 관음봉(432m)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여기까지다. 이곳에 서니 저 아래로 내소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멀리 곰소 갯벌과 서해도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온 세상이 다 눈부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