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영해] 장날 하루 전, 영해터미널에 도착했다. 느긋하게 하룻밤 머물렀다가 매월 5, 10일 열리는 영해오일장 구경에 나설 참이다. 시간도 때울 겸 자그마한 방앗간, 철물점, 담뱃가게가 오밀조밀 모인 읍내를 둘러볼 때는 몰랐다. 이토록 조용한 동네가 장날마다 어떻게 변하는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골목마다 장사진을 치고 있다. 간밤에 텅 비어 있던 시장 입구의 방앗간과 철물점 앞은 이미 정원초과. 물건을 내놓고 흥정하는 소리가 마구 섞여 들려오니 혼이 쏙 빠진다. 어제는 사람 구경하기도 어렵더니, 어디 숨었다가 이렇게 한꺼번에 나오셨나.
“나는 이짝 원구마을에서 나왔고 여기 양반은 위짝 신기마을서 왔고. 평소에 집에서 팔 거 쟁겨 놓고 있다가 장날 나와서 팔아 묵지. 시골 할마씨들은 다 그렇게 살어. 한번 씩 나와서 팔 거 팔고 살 거 사고. 말 다했응께 우리 집에서 딴 단감이나 한 봉다리 사 가.”
영해면 원구리에서 원정을 나온 김영혜 할머니가 단감 한소쿠리를 ‘박카스 봉지’에 담아 주신다. 엉겁결에 받아드는데 얼마냐고 대꾸할 틈 없이 단감 한 조각이 입에 들어온다. “봐라. 뭘 사든 맛을 보고 사야지. 우리 단감은 딴딴하니 맛있어서 오래뒀다 먹어도 괜찮여. 까마귀가 쪼사뿐 건 다 내삐고 빤질빤질 이쁜 놈만 담았으니께 집에 가서 맛있게 들어.” 2000원 어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묵직하다. 값을 치르고 산 것이 아니라 할머니 댁에 놀러 갔다가 단 것, 맛난 것 양손 묵직하게 챙겨 나올 때의 딱 그런 무게감이다.
난전의 행렬은 아케이드 지붕이 놓인 영해시장 중앙까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보따리와 바구니 색은 다 달라도 내놓은 물건은 대개 단감, 대추, 가지, 늙은 호박, 무말랭이 같은 집에서 키운 농작물이다. 그중 어른의 허벅다리만큼 굵은 수세미가 눈에 들어온다.
“이기 내가 키운 수세미인데 이걸 말리가꼬 운동화나 발 사이즈대로 딱 오려. 그걸 구두 신을 적에 신발 안에 깔면 발 냄새도 안 나고 푹신푹신해가 오래 걸어도 아프지도 않고 참 좋아. 거짓말인가 싶으면 내가 하나 오리줄 테니께 신 줘 봐. 좋은지 안 좋은지 봐야 알지.”
조금만 신기하다 싶어 멈춰 서면 집에서 키운 실한 농작물에 마음이 혹하고, 삶의 지혜를 일러주는 어르신의 재미난 입담에 반해 지갑이 열린다. 고성일 할아버지가 손수 오려준 수세미 깔창은 한 쌍에 3000원. 폭신한 감촉이 좋아 값을 치렀더니 설거지할 때 쓰라며 말린 수세미 서너 장을 더 챙겨주신다. 어째 산 것보다 덤으로 받은 것이 더 크다.
장터를 한 바퀴 돌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장사는 이미 뒷전인 장사꾼들이 많다는 것. 좋은 목을 찾아 새벽부터 나왔을 텐데, 목청껏 호객하는 사람보다 삼삼오오 모여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떠는 사람이 더 많다. 궁금했던 윗마을 아랫마을 사정을 묻고 답하느라 말소리가 한데 겹친다. 그러다 장터 한복판에서 별안간 쇳소리가 난다. 싸움이라도 붙었나 싶어 들여다보니 할머니 두 분이 작별 인사를 나누고 계신다. “아직도 다 몬 팔았나, 내는 다 팔아서 벌써 집에 간다” 하는 야속한 놀림에 “이 할마씨가 지금 누구 약 올리나. 퍼뜩 가기나 해라” 할머니 한 분이 빽빽 소리를 지른다. 놀란 마음에 들여다보다 슬쩍 미소 짓게 되는 경북 영해오일장의 오후 풍경. 볕이 참 따습다.
특산품 텃밭 농작물, 동해안 해산물
날짜 매월 5, 10일
고한오일장에서 만난 사람
대추 할머니
아니, 도대체 이름을 왜 안 알려주세요?
다 쭈그렁 빠진 할매 이름은 왜 자꾸 묻노. 그냥 대추 할머니라꼬 하면 알 사람 다 안다. 사진은 왜 자꾸 찍노. 치야라. 고마 추잡시라워서 안 찍을란다.
대추를 많이 팔아서 대추 할머니인가요?
집에 대추나무도 큰 놈이 있고 캐서 글케 부르제. 봐라. 오늘도 대추 안 가꼬 왔나. 대추는 벌건 놈이 질로 좋은 기다. 퍼런 거 사면 볕 좋은 데 말리야 되는데 아파트 살면서 어데다 말리노. 식구들 많지 않으면 그냥 한 되 사다가 쭈글기 전에 후딱 묵는 게 좋다.
대추도 밤도 모두 할머니가 딴 거예요?
그럼 내가 따지 누가 따준다 카드나. 밤은 우리 집 뒷산, 대추는 집 마당에 여문 놈으로 가지고 온기다. 시집 안갔제? 산밤은 처녀가 못 묵는다. 약을 안 치가꼬 벌레가 많아. 여 거믓한 구멍 보이제? 밤 살 땐 구멍이 있나 없나 잘 살피보고 없는 놈으로 골라야 돈 안버린다.
오늘의 장사 목표 매출은 얼마인가요?
이 무거운 걸 다 짊어지고 왔는데 많이는 못 팔아도 남아서 도로 가져가진 않아야 않긋나. 제값 받고만 팔면 5만원도 나올낀데 오늘 하는 걸 보니께 반도 팔기 힘들겠다. 그러니까 언능 비키라 마. 할매도 장사를 해야 집에 갈 거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