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평창] 횡계터미널에 내리니 공기부터 칼칼한 게 다르다. 역시 강원도는 강원도다. 어느 해보다 겨울이 따뜻한 탓인지 곳곳에 쌓여 있는 눈이며 매서운 바람도 그저 반갑기만 하다. 선자령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로 느껴져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백두대간의 심장부이자 눈꽃 트레킹의 최적지로 알려진 선자령. ‘진짜 겨울’이 그리워 여기까지 왔다.
선자령이 눈꽃 트레킹의 명소가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백두대간의 심장부이자 등뼈 중앙으로 구간구간에 백두대간의 백미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손꼽히는 비경을 큰 수고 들이지 않고 볼 수 있다는, 말하자면 노력 대비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1~2시간이면 올라간다는 그네들 말만 믿었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엔 눈꽃 트레킹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믿어보고 싶었다. 어린아이도 오를 수 있다는 완만한 능선에 눈꽃이 지천이라는 설명이 과장일지 아닐지는 겪어볼 일. 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한편으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등산화와 아이젠, 방한복까지 든든하게 챙기고 나름 비장한(?) 각오로 횡계로 향했다.
선자령은 등산이 아닌 트레킹 코스로 더 잘 알려져 있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강원도 평창군과 강릉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해발 1157m 봉우리, 선자령. 해발 고도만 본다면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시작 지점인 옛 대관령휴게소가 약 800m 지점에 있어 실제로는 350m가량만 오르는 셈이다. 이마저도 능선이 가파르지 않아 쉬엄쉬엄 주변 감상을 하며 걷기 좋은 길이다. 다만 자주 변하는 날씨와 칼바람 탓에 방풍과 방한에는 꼭 신경을 써야 한다.
대관령의 바람을 기억해주세요
트레킹의 시작은 대관령 옛길(상행선) 휴게소부터다. 하행선 휴게소는 능경봉 가는 길로 또 다른 코스다. 선자령은 오르기 쉬운 데 반해 대중교통편이 좋지 않아 승용차나 단체 여행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 휴게소부터 한국통신 송신탑까지는 걸음이 빠른 사람은 40분, 그렇지 않은 사람은 1시간 정도 걸린다. 길이 잘 닦여 있어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송신탑에 이르면 본격적인 선자령 트레킹의 시작인데 눈앞에 굽이굽이 펼쳐진 능선을 보니 저절로 깊은 숨이 터져나온다. 함께 산을 오른 일행 중 한 명이 하는 말, “아, 목이 시원~하다.” 칼칼했던 목도 금세 시원하게 만드는, 이 바람이 바로 그 유명한 ‘대관령 바람’이다.
선자령까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히 섞여 있어 지루할 틈이 별로 없을 뿐더러 뽀득뽀득 눈을 밟는 게 흙길을 걷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다.
조금 가다보니 풍력발전기들이 점점 가까워진다. 대관령 초원에서 수십 기의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걸 보니 나름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런데 이 풍력발전기를 두고 얘기가 많았다. 누군가는 대관령의 새로운 명물이라 하고 또 낭만적이라고도 하지만, 한편에선 대관령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날개가 돌며 내는 바람 소리가 대관령의 자연 바람을 해치기 때문일까. 그 인위적인 바람 소리는 내게도 낯설게 느껴진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북쪽의 차가운 공기가 만나 선자령의 바람은 강하기도 하고 매섭기도 하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대관령에 풍력발전기가 세워진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본래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평창군 문화관광해설사 박윤희 씨는 “다른 것보다도 대관령에 불어오는 자연 바람을 꼭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풍경도 좋고 공기도 좋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대관령 바람에 실려 있다는 뜻이다.
눈과 바람과 나무의 하모니, 눈꽃
선자령 정상은 거칠 게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득하게 보이던 선자령 정상 표석이 가까워지자 발걸음에 한층 힘이 들어간다고. 최근에 새로 세워진 표석으로 ‘백두대간 선자령 해발고 1157m’라고 표시되어 있다. 맞은편에는 이전에 사용되었던 작은 표석이 있는데 마치 굴러온 돌에 자리를 뺏긴 듯 한쪽에 찌그러져 있는 모습이다.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은 올겨울부터 개방된 선자령~의야지 코스를 택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의 눈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눈이 많이 녹아 섭섭한 감이 들었던 터라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덜 지난 길을 걸어보고 싶어서다. 선자령에서 새봉령을 따라 내려오는 2시간 남짓 코스로 지금까지는 아는 사람들만 다니던 길이었다고.
고라니, 토끼, 멧돼지 발자국밖에 없던 눈길에 사람 발자국이 더해진다. 한동안 발자국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눈꽃들이 나도 좀 봐달란다. 바람 말고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주목엔 눈꽃이 활짝 피어 있다. 잎을 다 떨구고 마른 장작 같던 나무들에 흰 눈이 내려앉으니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눈꽃이라는 이름, 참 잘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도 절대로 가져갈 수는 없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지만 좋은 방법은 그 순간을 즐기는 것뿐이다. 일부러 만들 수도 없고 또 한겨울이 아니면 볼 수 없으니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눈에 담아둔다.
풍력발전기 관리 차량을 위해 만들어진 도로를 걷기도 하고 고랭지 배추밭을 지나다보니 의야지(바람 마을)에 이른다. 아직 완전히 정비된 것이 아니라서 다소 험한 코스도 있지만 한겨울에는 이 일대에서 눈이 가장 많이 쌓이는 곳으로 통한다. 4~5월까지도 눈 절벽이 남아 있는 곳이라는 게 의야지마을 김영교 씨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등반객들은 선자령 정상에 올랐다 다시 같은 길을 따라 하산하거나 보현사로 내려간다. 강릉 초막교로 내려갈 수도 있는데 길이 가파라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는 ‘비추’다.
간혹 삼양목장 방면으로 하산하는 사람도 있지만 삼양목장은 따로 둘러볼 것을 권한다. 다른 계절엔 목장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야 하지만 겨울철에 한해 셔틀버스 운행이 중단되기 때문. 4륜 구동 또는 월동 장비를 갖춘 차에 한해 자유롭게 돌아볼 수 있다.
